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烏江/夏日絕句-李清照

白雲 2025. 1. 25. 00:07

烏江(오강)/夏日絕句(하일절구)
-李清照(이청조)

生當作人傑(생당작인걸),
死亦為鬼雄(사역위귀웅)。
至今思項羽(지금사항우),
不肯過江東(불긍과강동)。

살아서는 모름지기 호걸로 살고
죽어서도 귀신 중의 영웅이 되어야 하네.
지금에 이르러 항우를 생각하는 것은
강동으로 돌아가기를 마다했기 때문이라네.

<원문출처> 烏江<一題「夏日絕句」>/作者:李清照 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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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烏江(오강) : 장강(長江)의 지류 중 하나로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화현(和縣)에 있는 강이다. 초나라와 한나라가 싸울때 항우(項羽)가 패하여 자살한 곳이다.
◯ 鬼雄(귀웅) : 백귀(百鬼) 중의 웅걸(雄傑). 장렬히 죽은 사람을 칭송할 때 쓰인다.
◯ 강동(江東) : 장강(長江) 하류 지역. 지금의 건강(建康)ㆍ태평(太平)ㆍ영국(寧國)ㆍ휘지(徽池) 등지이다.
◯ 不肯過江東(불긍과강동) : 해하전투에서 한신의 교묘한 전략으로 팽성이 함락되고, 한신의 계략으로 초의 진지를 향하여 초나라의 노래를 퍼뜨렸고(사면초가) 고향 생각에 사로잡힌 병사들은 단체로 한나라에 투항하여 28명의 병사만 남고 한신에게는 100만의 군사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수많은 포위망을 뚫고, 2명이 죽고 단 26명은 해하에서 최후의 싸움을 벌이나, 패배하여 결국 25명의 군사는 전부 죽고 항우만 남았다. 항우는 결국 오강에서 자결하고 만다.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서는 “항왕은 동쪽으로 오강(烏江)을 건너려 했다. 오강의 정장(亭長)이 배를 갖다 대고 기다리다가 ‘강동이 비록 작지만 땅이 사방 천리요, 무리가 수십 만이라 왕이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대왕께서는 서둘러 건너십시오. 지금 저한테만 배가 있기 때문에 한나라 군사가 와도 건널 길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항왕이 웃으며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데 내가 어찌 건너겠는가? 또한 이 항적이 강동 자제 8천 명과 강을 건너 서쪽으로 왔는데 지금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으니 강동의 부형들이 가련하게 여겨 나를 왕으로 삼는다 해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보겠는가? 설사 저들이 아무 말 하지 않는다 해도 이 항적의 마음이 부끄럽지 않겠는가?’라 했다.”라고 기술하였다. <사기 권7. 項羽本紀항우본기>

오강(烏江)은 하일절구(夏日絕句)라고도 하며 송나라의 사인(詞人) 이청조의 오언절구이다.
정강2년(靖康二年) 1127년에 금(金)나라가 송나라의 동경을 함락시켜 북송은 멸망하였고, 송 고종(高宗)이 남경응천부(南京应天府), 지금의 하남(河南) 상구(商丘)에서 황위를 계승해 즉위하고 연호를 건염(建炎)으로 바꾸고 송 왕조를 재건한 것을 남송(南宋)이라 일컫게 되었다.
이청조는 집권자들이 일신의 안일만 추구하며 잃어버린 강산을 수복하는 데 뜻을 두지 않자 고종(高宗)을 항우(項羽)와 대비시킴으로써 비겁하고 안일한 위정자를 비판한 것이다.

*이청조(李淸照, 1084년~1156?) : 중국 남송의 여류사인이다. 호는 이안거사(易安居士) ·수옥(漱玉)이다. 북송의 제남(濟南) 태생으로 부친은 소동파(蘇東坡)의 문인으로 후사학사(後四學士)를 지낸 이격비(李格非)이며 강직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다. 18세에 명망 있는 집안의 자재이자 금석문의 연구가인 조명성(趙明誠)과 혼인하였다.

북송(北宋) 말 금(金:여진족)나라가 침략해오자 금석과 고서들을 보존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남경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그들 부부가 수집한 금석과 고서화의 많은 분량이 소실되었다. 이청조는 43세에 강령(江寧)에 있을 때 남편 조명성이 남경에서 병으로 죽어 이후에 항주, 소흥 등지를 떠도는 난민 생활을 하여 말년에는 처참하게 살았으며 남편과 떨어져 지내며 그리워하는 내용과 이별을 담은 주옥같은 사(詞)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