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從心所欲不踰矩>
종심소욕불유구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吾十有五而志于學),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
(三十而立),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
(四十而不惑),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으며
(五十而知天命),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었고
(六十而耳順),
일흔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공자가 論語 爲政篇 에서 나이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그것이 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회고한 데서 從心所欲不踰矩 가 70세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줄여서 종심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종심은 고희 및 칠순과 동의어이다. 15세는 志學
<孔子의 출생지 곡부(曲阜, 취푸)>
중국 산동성 지닝시 관활 시로 공자의 출생지로 유명하다
전설에 의하면 삼황오제 중의 염제(신농씨), 황제와 그의 아들 소호가 취푸의 땅을 도읍에 정했고 하 왕조 시대에는 엄국에 속했다고 하나, 사료상으로 확실한 것은 주 무왕이 동생 주공 단을 이 땅에 분봉하면서 이곳이 한 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주공 본인은 노에 머무르지 않고 아들 백금에게 맡기고 자신은 수도에 남아 무왕 사후의 불안정한 정치를 보좌했다고 한다. 이후로 이 땅은 873년의 긴 세월에 걸쳐 노국의 도성이 되었으며, 주 천자의 제후국의 수도 가운데 가장 길게 이어지게 되었다.
춘추 시대에 후세에 문성(文聖), 대성지성선사(大成至聖先師)라 불리게 될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가인 공자가 출현했다. 그의 사상은 후에 「유교」라고 불리며 중국이나 동아시아에 수천 년에 걸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공자의 사후 1년 후에 노공은 공자에 대한 제전을 실시했다. 전한 시대에 들어가면서 고조 유방은 한층 더 대대적으로 공자를 제사 지내는 의식을 거행하게 했다. 공자의 자손들은 취푸에 대대로 거주하면서 역대 조정으로부터 봉상을 받아 연성공(衍聖公)이라는 칭호를 세습하여, 점차 중국 제일의 명가가 되었다.
취푸 주변에는 10만명 이상의 공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 취푸에 있는 공자의 무덤(공자묘)이나 거주지(직계의 자손이 사는 궁전)는 공묘, 공부로 불려 역대 황제의 보호 아래 끊임없이 확장해, 오늘날 볼 수 있는 장대한 건축군이 되었다. 또 취푸의 북쪽에는 약 10만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 숲, 공림은 공가의 묘지와 일가족의 묘지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것이다. 취푸의 공부, 공묘, 공림(삼공)은 세계 유산에도 등록되어 있다.
*공자의 論語 學而篇 첫구절
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而不愠,不亦君子乎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남들이 몰라줘도 성내지 않으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