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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欄梨花/ 蘇軾

시뜨락 시정(詩庭) 2025. 12. 2. 20:59

東欄梨花/ 蘇軾  

梨花淡白柳深青 [이화담백유심청]
배꽃 담백하고 버들잎 더욱 푸르러
柳絮飛時花滿城 [유섬비시화만성]
버들개지 흩날리는 시절, 미저우(密州) 성에도 꽃 만발하였으리
惆悵東欄一株雪 [추창동난일주설]
동편 난간의 흰 꽃 만개한 배나무 보면 안타깝지 아니한가

人生看得幾清明 [인생간득기청명]
살면서 몇 번이나 더 이처럼 봄을 즐길 수 있을꼬

동란이화(東欄梨花)는 "동편 난간의 배꽃"이란 뜻이다. 이 시는 시인이 배꽃이 만개하고 버들개지가 흩날리는 봄 풍경을 보며 느낀 소회를 적은 것이 아니다. 이 시는 적게 된 배경을 알아야 무리 없이 옳게 감상할 수 있다. 이 시를 적을 무렵의 소식(蘇軾)은 40살 무렵으로, 1069년 시작된, 왕안석의 신법을 토대로 한 급진적인 개혁에 반대하다가 조정에서 밀려나서 지방관으로 전전하던 시절이었다.

소식은 1074년 12월 초에 산뚱성의 미저우[密州, 현 주청시(諸城市)]에 부임하여 2년 근무한 후에, 1076년 12월 하순 장쑤성의 쉬저우(徐州)로 옮겨 갔는데 이때 후임자로 미저우(密州)의 지방관으로 부임한 사람이 공자의 46대 직계 장손인 공종한(孔宗翰)이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공자의 직계 장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전국적인 명사(名士)의 반열에  올랐었기에 공종한은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는 인물이었고, 소식은 22세에 과거에 급제할 때부터 온 나라가 다 인정해 주는 자타공인의 수재였던 터라 전임자와 후임자로 만나기 전부터 어느 정도의 친분이 있던 관계였다.

공종한(孔宗翰)은 떠나는 소식에게 일종의 작별의 선물로 5수의 절구를 써주었다. 이듬해인 1077년 4월 쉬저우(徐州)의 소식은 이에 대한 답례로 和孔密州五絕(미저우의 공종한에게 화답하는 시 5수)를 써서 공종한에게 보냈는데 총 5수 중 세 번째가 東欄梨花이다. 東欄은 미저우의 관저의 동쪽 난간으로 그곳에 배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곳에서 두 번의 봄을 보내며 배나무 꽃을 즐겼던 소식은 봄이 되자, 그 나무에 배꽃이 눈처럼 희게 만발했을 것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지켜보며 봄을 만끽할 공종한(孔宗翰)에게 봄 인사로 이 시를 써보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