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鼓歌(석고가) - 韓愈(한유)
〈석고에 붙인 노래〉

張生手持石鼓文(장생수지석고문),
勸我試作石鼓歌(권아시작석고가).
少陵無人謫仙死(소릉무인적선사),
才薄將奈石鼓何(재박장내석고하).
장생이 손에 석고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한 번 석고가 지으라고 권하네.
소릉엔 사람 없고, 적선도 죽었으니
재주 부족한 내가 장차 어찌 석고가를 짓겠는가.
周綱陵遲四海沸(주강릉지사해비),
宣王憤起揮天戈(선왕분기휘천과).
大開明堂受朝賀(대개명당수조하),
諸侯劍佩鳴相磨(제후검패명상마).
蒐于岐陽騁雄俊(수우기양빙웅준),
萬里禽獸皆遮羅(만리금수개차라).
鐫功勒成告萬世(전공륵성고만세),
鑿石作鼓隳嵯峨(착석작고휴차아).
從臣才藝咸第一(종신재예함제일),
揀選撰刻留山阿(간선찬각류산아).
雨淋日炙野火燎(우림일자야화료),
鬼物守護煩撝呵(귀물수호번휘가).
주나라 기강이 무너져 사해가 들끓으니
선왕이 분발하여 하늘의 창 휘둘렀네.
크게 명당 열고 조하를 받으니
제후들의 칼과 패옥 서로 부딪쳐 울렸다오.
기산 남쪽에서 사냥하여 영웅과 준걸들 달리게 하니
만 리의 금수들 모두 길을 막아 그물로 잡았도다.
공을 새기고 성과를 기록하여 만세에 알리려
돌 깎아 북 모양 만드느라 높은 산 무너뜨렸네.
따르는 신하들 재주와 기술이 모두 제일이라
선발하여 글 지어 새겨 산아에 남겼도다.
비에 젖고 햇볕 쬐고 들불에 타도
귀물(鬼物)이 수호하고 애써 물리쳐 꾸짖었네.
公從何處得紙本(공종하처득지본),
毫髮盡備無差訛(호발진비무차와).
辭嚴義密讀難曉(사엄의밀독난효),
字體不類隸與蝌(자체불류례여과).
年深豈免有缺畫(연심기면유결화),
快劍砍斷生蛟鼉(쾌검감단생교타).
鸞翔鳳翥眾仙下(난상봉저중선하),
珊瑚碧樹交枝柯(산호벽수교지가).
金繩鐵索鎖鈕壯(금승철색쇄뉴장),
古鼎躍水龍騰梭(고정약수룡등사).
陋儒編詩不收入(루유편시불수입),
二雅褊迫無委蛇(이아편박무위사).
공께선 어디에서 탁본을 얻었는가
털끝만한 획도 모두 갖추어져 어긋남이 없구려.
문사(文辭)는 엄정하고 뜻은 정밀하여 읽어도 깨닫기 어렵고
자체는 예서도, 과두문자도 닮지 않았네.
세월이 깊었으니 빠진 획을 어찌 면할까만
예리한 칼로 살아있는 교룡과 악어 잘라 놓은 듯하네.
난새와 봉황이 날아오르고 신선들이 내려오는 듯
산호(珊瑚)와 벽수(碧樹) 가지가 서로 얽혀 있는 듯
금줄과 쇠사슬이 서로 얽혀 힘차고
옛 솥이 물에서 뛰듯, 용이 북으로 변해 날아가듯
고루한 선비들이 시를 엮을 때 수록하지 않았으니
〈大雅(대아)〉와 〈小雅(소아)〉는 편협하고 궁박하여 여유가 없네.
孔子西行不到秦(공자서행부도진)
掎摭星宿遺羲娥(기척성수유희아).
嗟予好古生苦晚(차여호고생고만),
對此涕淚雙滂沱(대차체루상방타).
憶昔初蒙博士徵(억석초몽박사징),
其年始改稱元和(기년시개칭원화).
故人從軍在右輔(고인종군재우보),
為我度量掘臼科(위아도량굴구과).
공자는 서쪽에 갔지만 진나라에 이르지 않았으니
별은 주워 모았으나 희아(羲娥)는 버려둔 셈이네.
아! 나는 옛것을 좋아하지만 늦게 태어나
이것을 마주하여 두 줄기 눈물이 쏟아지는구나.
생각건대 처음으로 박사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해 처음으로 원화라 개칭했네.
친구가 종군(從軍)하며 우보(右輔)에 있으면서
나를 위해 헤아려 석고 놓을 자리 파 놓았네.
濯冠沐浴告祭酒(탁관목욕고좨주),
如此至寶存豈多(여차지보존기다).
氈包席裹可立致(전포석과가립치),
鼓祇載數駱駝(십고기재수락타).
薦諸太廟比郜鼎(천제태묘비고정),
光價豈止百倍過(광가기지백배과).
聖恩若許留太學(성은약허류태학),
諸生講解得切磋(제생강해득절차).
觀經鴻都尚填咽(관경홍도상전인),
坐見舉國來奔波(좌견거국래분파).
剜苔剔蘚露節角(완태척선로절각),
安置妥帖平不頗(안치타첩평불파).
大廈深簷與蓋覆(대하심첨여개복),
經歷久遠期無佗(경력구원기무타).
관(冠) 씻고 목욕하여 좨주(祭酒)에게 아뢰기를
“이처럼 지극한 보물이 남아있는 것 어찌 많으리오.
담요로 싸고 자리로 말면 즉시 가져올 수 있으니
열 개의 석고(石鼓)는 몇 마리 낙타면 실어 올 수 있습니다.
태묘에 올려 고정(郜鼎)과 나란히 놓는다면
광채와 가치가 어찌 백배에 그치리오.
성은으로 만약 태학에 보관하길 허락하신다면
제생들은 강구하고 해석하여 학문을 갈고 닦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석경(石經)을 관람하느라 홍도문도 메웠는데
장차 온 나라에서 물밀듯이 몰려드는 것 볼 것입니다.
이끼를 깎아내고 도려내어 마디와 모서리 드러내고
편안히 두고 평평히 하여 기울어지지 않게 하여
큰 집에 깊은 처마로 덮고 가려준다면
세월이 오래도록 지나도 별 탈 없을 것입니다.”
中朝大官老於事(중조대관로어사),
詎肯感激徒媕婀(거긍감격도암아).
牧童敲火牛礪角(목동고화우려각),
誰復著手為摩挲(수부저수위마사).
日銷月鑠就埋沒(일소월삭취매몰),
六年西顧空吟哦(육년서고공음아).
羲之俗書趁姿媚(희지속서진자미),
數紙尚可博白鵝(수지상가박백아).
繼周八代爭戰罷(계주팔대쟁전파),
無人收拾理則那(무인수습리칙나).
조정의 대관들은 모든 일에 익숙할 터
어찌 감격만하고 우물쭈물 하는가.
목동들 부싯돌로 삼고 소는 뿔로 비벼대니
누가 다시 손대어 어루만질까.
나날이 없어지고 다달이 삭아 매몰되어가니
육년 동안 서쪽을 바라보며 공연히 한숨짓네.
왕희지의 속된 글씨 아름다운 모습에만 내달렸어도
몇 장의 종이 오히려 흰 거위와 바꿀 수 있었는데
주나라 이은 팔대에 전쟁이 끝났으나
석고 돌보는 이 없으니 어이된 일인가.
方今太平日無事(방금태평일무사),
柄任儒術崇丘軻(병임유술숭구가).
安能以此上論列(안능이차상론렬),
願借辯口如懸河(원차변구여현하).
石鼓之歌止於此(석고지가지어차),
嗚呼吾意其蹉跎(오호오의기차타).
지금은 태평시대라 아무 일이 없으니
유학(儒學)을 높여 쓰고 공맹(孔孟)을 숭상하는 이때
어찌하면 이것을 논의에 부칠까.
원하노니, 현하와 같은 구변(口辯)을 빌었으면
석고의 노래 여기서 그치니
안타깝다 나의 뜻은 이뤄지지 않음이.
[通釋] 장적이 〈석고문〉 한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석고가〉를 지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백과 두보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나는 그들처럼 천재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지 않아 어찌할 바를 모를 뿐 석고가를 지을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주나라의 기강과 법도가 무너지고 사해가 들끓는 가운데 선왕은 직접 창을 들고 휘둘러 중흥시켰다. 명당을 크게 열고 제후의 조회를 받았는데, 그들이 허리에 차고온 검과 패옥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들이 청명하게 울렸다.
이에 선왕은 기산의 남쪽에서 사냥을 하며 영웅ㆍ준걸들을 달리게 하여 만리의 금수를 일거에 모두 포획하였다. 사관이 이러한 공업을 만세에 알리고자 돌에 새겨 놓은 것이다. 이에 그들은 돌을 북 모양으로 만들어, 울퉁불퉁한 곳 하나 없이 고르게 다듬었다. 선왕을 곁에서 모시고 있던 신하는 재주와 학문이 모두 일류인데도 그들 중에서 특히 뛰어난 자를 가려 뽑아 글을 짓게 하고 돌에 새겨서 산아에 남겨두었다.
이러한 石鼓는 비록 비에 흠뻑 젖고 따가운 햇볕에 들불에 타기도 하였는데, 다행스럽게 귀신들이 그것을 수호하여 애써 돌보아주었다. 장공께서는 어디서 탁본을 얻으셨는가. 그가 얻은 탁본들은 모두 완정하여 한치의 오차가 없구나. 내 보니, 이 문자들의 뜻이 엄정하고 정밀하여 읽어도 깨닫기 어렵고, 글자체는 예서도 아니고 과두문자도 아닌 매우 특이한 것이다.
세월이 오래된 까닭에 글자의 획이 빠진 것은 피하기 어렵구나. 저 필체의 웅혼함을 보니, 마치 예리한 칼로 살아 있는 교룡을 베어낸 듯 하고, 난새와 봉새가 날며 춤을 추는 듯, 여러 신선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듯, 산호와 벽수의 가지들이 서로 얽혀 있는 듯 신비롭다.
또한 금줄과 쇠사슬로 얽어매어 고리를 엮어 놓은 듯 하며, 고정(古鼎)이 깊은 연못에 빠져 일으키는 파동과 같기도 하고, 용이 나는 북으로 변한 듯하기도 하다. 비루한 선비들은 《詩經》을 엮으면서 이것을 수록하지 않아 오히려 〈二雅(이아)〉를 편협하게 만들었다. 공자가 여러 나라를 주유하면서도 秦을 거치지 않아서 마치 별들을 모으면서 가장 중요한 해와 달을 빠뜨린 것과 같은 것이다.
내 비록 오래된 것을 좋아하지만 너무 늦게 태어난 것이 한이 된다. 이 탁본을 보니 진실로 내 눈에 눈물이 흐르는구나. 생각해보면, 처음 내가 국자박사가 되었을 때는 연호를 開元에서 元和로 고쳤던 때인데, 나의 절친한 벗이 봉상절도부에 종사하면서 나를 도와 石鼓를 발굴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나는 의관을 정제하고 목욕재계한 후 국자감의 좨주에게 아뢰기를,
“이처럼 보존할 가치가 높은 보물들이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담요로 싸고 자리로 말아 가져 오는데, 그저 몇 마리의 낙타면 열 개의 석고를 싣고 올 수 있습니다. 가져와서는 저 태묘에 헌납하여 고정(郜鼎)과 나란히 놓는다면 그 가치가 어찌 백배에만 그치겠습니까. 황상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태학에 보관해두길 허락해 주신다면 제생들은 강구하
여 학문을 절차탁마 할 것입니다. 漢代 채옹이 석경을 태학문 밖에 새겨놓았더니, 온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초사(抄寫)하기 위해 모여 들던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끼를 제거하고 필획(筆劃)의 모서리와 마디가 잘 드러나게 한 뒤, 평평한 곳에 잘 두고 큰 집의 처마로 덮어주고 가려준다면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조정의 대관들은 일 처리에 능숙한데도, 감탄만 하고 왜 빨리 결정내리지 못하는가. 그러는 사이 목동들은 석고를 부싯돌 삼아 불을 켜고, 늙은 소는 뿔로 비벼대니 누가 다시 손대어 아끼고 보호해주겠는가.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석고는 삭아서 매몰되어가니, 육 년 동안 서쪽만 바라보며 공연히 한숨짓는구나. 왕희지의 필법은 아름다운 것만 추구했지만, 그가 쓴 몇 장의 종이는 흰 거위와 바꿀 수가 있었거늘, 여덟 왕조에 전쟁이 모두 끝났으나 아무도 석고를 수습하는 이 없으니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은 태평시대라 아무 일 없어 유학을 높여 쓰고 공맹을 숭상하는 이때 내 어찌하면 이것을 논의에 부칠 수 있는가. 떨어지는 폭포수 같은 구변을 빌어 이 일을 의논해보고 싶다. 〈석고가〉는 여기서 그칠 것이나, 이 뜻을 실현시키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解題] 〈석고가〉는 한유의 유명한 시편으로서, 저작 시기는 元和 6년(811)이다. 이때는 한유가 하남(河南:지금의 河南省 洛陽市) 현령(縣令)이었다가 마침 상서직방원외랑(尙書職方員外郞)으로 승직하여 장안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이다. 이 시는 찬미(讚美)는 물론, 풍자(諷刺)의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는데 석고(石鼓)와 석고문(石鼓文)의 중요한 가치를 인식하고 보존ㆍ연구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석고(石鼓)와 석고문(石鼓文)처럼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귀중한 보물이 저 황무지에 방치되어 있어서는 안 되며, 마땅히 太學으로 운반되어 보호 받아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특히 한유가 詩에서 조정(朝廷)의 大官들이나 누유(陋儒)를 언급하고 또한 ‘공자는 서쪽에 갔지만 진나라에 이르지 않았으니, 별은 주워 모았으나 희아(羲娥)는 버려둔 셈이네.[孔子西行不到秦 掎摭星宿遺羲娥]’라 한 것은 석고와 석고문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당시 현실에 대해 자신의 불만을 토로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 石鼓(석고) : 중국(中國)의 현존하는 석각(石刻)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그 모양이 북을 닮았다 해서 석고(石鼓)라 칭한다. 당(唐)나라 초기에 섬서성(陝西省) 봉상(鳳翔) 지역에서 출토된 것이 10개인데, 위응물(韋應物)과 한유(韓愈)는 이를 두고 주(周) 선왕(宣王)이 岐陽에서 수렵할 때 새겨 놓은 것이라 하였다. 근자에 秦나라의 유물이라 고증되었는데, 춘추말년에서 전국시대에 이르는 시기로 추정된다.
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이 말하기를 “석고(石鼓)는 기산(岐山) 남쪽에 있다.” 하였고 위응물(韋應物)은 “문왕(文王)의 북이니 선왕(宣王) 때에 이르러서 시(詩)를 새겼다.” 하였고 한퇴지(韓退之)는 “곧바로 선왕(宣王)의 북이다.” 하였는 바, 지금 봉상(鳳翔)의 공자(孔子) 사당 가운데에 있다. 북이 열 개가 있었는데 먼저는 들에 흩어져 버려졌다. 정여경(鄭餘慶)이 이것을 사당에 가져다 놓으면서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송(宋)나라 황우(皇祐) 4년에 向傳師(상전사)가 민간에서 구하여 찾아내어 열 개의 북이 마침내 갖추어졌다. 글자는 알 수 있는 것이 465字이고 마멸되어 알기 어려운 것이 반이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