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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老歌-張籍

뜨락 시정(詩庭) 2024. 12. 13. 07:08

野老歌(야노가)-張籍(장적)

<늙은 산골농부의 노래>
 
老農家貧在山住(노농가빈재산주)
늙은 농부 집이 가난하여 산에서 사는데
耕種山田三四畝(경종산전삼사무)
산골 밭 서너 뙈기 애써 일군다.
苗疏稅多不得食(묘소세다부득식)
묘는 적고 세금은 많아 먹을 수 없는데
輸入官倉化爲土(수입관창화위토)
관가 곳간으로 가져가면 흙으로 변할터!
歲暮鋤犁傍空室(세모서리방공실)
세모에 호미와 쟁기 빈 창고에 세워두고
呼兒登山收橡實(호아등산수상실)
아이들 불러 산에 올라 도토리 줍는다.
西江賈客珠百斛(서강매긱주백곡)
서강의 배르 가진 장삿군은 진주만 백섬
船中養犬長食肉(선중양건장식육)
배 안에서 기르는 개도 고기로 배를 불린다네

*산농사(山農詞)라고도 한다. 관리들에게 잔혹한 수탈과 압제를 당하는 산촌의 늙은 농부가 힘써 일하기는 하나 결국은 먹을 것도 없게 되는 비참한 현실을 그렸다. 늙은 농부는 집이 가난하여 산중에 살면서 3-4무(畝)에 불과한 밭떼기에 의지하여 살고 있다. 당나라 때 한 무는 180평으로 3-4무는 6-7백 평의 아주 작은 밭이다. 파종한 곡식은 적으나 세금은 많아 먹을 양식이 남지 않는다. 그나마 부세로 바치는 양식이 관청의 창고에 들어가면 결국은 썪어서 흙으로 변한다. 세모가 되면 집에는 별수 없이 호미와 쟁기를 텅텅빈 곳간에 세워두고 아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 도토리를 주워 허기를 채운다. 장강의 서쪽에서 온 부유한 상인의 배 안에는 진주만 백섬이 있다하고 기르는 개도 고기만으로 배터지게 먹는다고 했다.

*张籍(766—830)
당나라 중당시인이다. 자는 문창(文昌)이고 원적은 지금의 강소송 소주시인 오군(吳郡)이다. 후에 지금의 안휘성 화현(和縣)인 화주(和州)로 이주했다. 정원(貞元) 15년 (799) 한유의 천거로 진사에 급제하여 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수부원외랑(水部員外郎)、국자사업(國子司業( 등의 관직을 거쳤다. 사람들은 그를 장수부(張水部) 혹은 장사업(張司業)이라고 불렀다. 유년기에 곤궁한 생활을 했고 후에 관리생활도 비교적 낮은 직급에 있었다. 그가 활동했던 때는 대종(代宗)과 덕종(德宗) 때로 통치계급의 가렴주구 행위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지방관들은 황제의 명을 빙자해서 농민들을 수탈했다. 비교적 직급이 낮아 하층민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던 장적은 현실적인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폭정과 수탈에 고통 받고 있는 피지배층의 고충을 시가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의 악부시는 한위악부의 훌륭한 전통을 계승하여 현실의 문제를 과감하게 폭로했다. 그의 시풍은 원진(元稹)과 백거이(白居易)로 전승되어 신악부운동을 일으키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유집에 《張司業集(장사업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