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원 김홍도(1745∼?)가 그린 ‘산사귀승도(山寺歸僧圖)’에 등장하는 그림 속 산사가 황해 해주시의 ‘신광사(神光寺)’라는 분석이 나왔다.
이 그림은 가을철 깊은 산속 계곡에 있는 산사를 향해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스님을 표현했다.
겸재 정선(1676∼1759)과 달리 실경(實景)을 거의 남기지 않은 단원의 특성상 희귀한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작품 상단 4행의 시문이 많이 훼손돼 그간 제작 배경과 시기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최근 남아 있는 글씨를 고문헌과 비교 분석한 작업 끝에 석주 권필(1569∼1612)이 ‘신광사’를 주제로 쓴 시 “落月疎鐘古寺樓(지는 달빛에 성근 종소리는 옛 산사에서 들리네)”와 같은 구절로 확인됐다.
1631년 조선 선조 때 문인 석주 권필(石洲 權韠, 1569~1612)의 대표 저서 ‘석주집(石洲集)’에 실린 ‘신광사(神光寺)’에 관한 시임이 밝혀져 이곳이 해주 신광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의 원문은 이렇습니다.
《浮世功名已謬悠(부세공명이류유)
林泉聊可慰窮愁(임천료가위궁수)
秋風赤葉寒溪水(추풍적엽한계수)
落月疎鐘古寺樓(낙월소종고사루)
達士以閑爲好事(달사이한위호사)
殘年唯懶是良籌(잔년유라시량주).
‘덧없는 세상의 공명은 이미 부질없는 것이니,
임천에서 애오라지 곤궁한 시름을 달랠 만해라.
가을바람에 붉은 단풍잎은 찬 시냇물에 떨어지고,
지는 달빛에 성근 종소리는 옛 산사에서 들린다.
달사는 한가한 것을 좋은 일로 여기나니,
여생에는 오직 게으른 것이 좋은 계책일세.’
권필의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에서 소공(蘇公)이 부쳐준 시에 차운하다’.》
김홍도는 권필의 시에서 3·4번째 구절을 적어 놓은 것으로 그림의 모습과 너무 딱 맞아 떨어지는 구절입니다.
신광사의 모습을 유추할 만한 시가 하나 더 있습니다,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 제1권 좌막록(佐幕錄)에 실린 신광사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宮殿麗巖腰(궁전려암요)...
欹側週廊巧(의측주낭교)...
‘산허리에 들어선 화려한 궁전 …중략… 비스듬히 세워진 주랑 공교하고….’
여기에서 비스듬히 세워진 주랑은 바로 저 누각형 다리를 묘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해주 신광사는 ‘삼국유사’에 923년(고려 태조6) 윤질(尹質)이 중국에서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을 가져와 절에 모셨다는 기록으로 보아 창건연대는 그 이전으로 추정됩니다.
그 후 고려 현종과 문종, 숙종이 행행(行幸)하면서 사격이 높아졌으나 어느 때인가 점차 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1334년(충숙왕 복위 3년)에 원나라의 마지막 왕 순제(順帝)가 세자시절 서해 대청도에서 귀양살이 하던 중 해주의 북숭산 기슭에 이르렀을 때 나무와 우거진 수풀 속에 한 부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만약 부처님의 도움을 얻어 환궁해 황제에 등극할 수만 있다면 마땅히 절을 지어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후 순제는 원나라로 돌아가 황제로 즉위하였는데 어느 날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서 “어찌 서로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라는 말을 남기니 순제는 예전 기억을 떠올려 거금과 원나라 공장(工匠) 37명을 동원하여 이 절을 중창하였는데, 그 웅장하고 화려하기가 동방에서 으뜸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었고 전지(田地)가 250결, 거주하는 승려는 120명이나 되는 거찰이었습니다. 그러나 1677년 4월5일 큰 화재로 전각과 불상 등이 모두 불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 복원을 하였다는 기록이 신광사에 대한 마지막 소식입니다.
김홍도가 이 그림을 그린 18세기 후반까지는 사격을 유지했으나
현재는 폐사되었고 1324년(충숙왕 12)에 세워진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2호 신광사오층탑과,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3호 신광사무자비(神光寺無字碑)만 남아 있습니다.
그림 왼쪽에는 당대 최고 서화감식가인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 선생의 글이 있습니다.
“애석하다. 단원의 낙관이 이미 이지러졌고 쓴 시 또한 반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린 솜씨가 매우 좋을 뿐 아니라 찍어둔 낙관이 완전하고 볼만해 보배로 갈무리 할 만하기에 매우 좋은 작품이다. 위창노인 제(惜 檀園落款 已缺 題詩半泐 然畵法 甚佳印文完好 殊可珍賞. 葦滄老人 題)”
김홍도가 황해도 해주 신광사와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황해도 해주는 한강에서 배나 말을 타고도 이틀이면 갈 수 있는 멀지 않은 곳이기에 말년 불자의 삶을 추구한 단원이 명찰인 신광사를 방문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특히 원 세자가 이곳에서 불공을 드려 황제로 등극했다는 이야기는 기울어진 가세로 아들 걱정이 대단했던 김홍도에게 더욱 가보고 싶은 사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해주 신광사의 모습. 이렇게 그림으로나마 이곳이 신광사였음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해주 신광사의 모습을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광사가 얼마나 운치 있고 멋진 산사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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