臨江仙.自洛陽往孟津道中作-金 元好問
임강선.낙양에서 맹진으로 가는길에 지음-금 원호문
今古北邙山下路 (금고북망산하로)
고금의 북망산 아래 길은
黃塵老盡英雄 (황진노진영웅)
많은 영웅들 죽어 누런 먼지로 변했지.
人生長恨水長東 (인생장한수장동)
인생길 한은 길고 장강 물은 동으로 흐른다.
幽懷誰共語 (유회수공어)
깊은 회한 누구와 함께 얘기하나,
遠目送歸鴻 (원목송귀홍)
멀리 눈길은 기러기 돌아가는 것만 전송하네.
蓋世功名將底用 (개세공명장저용)
세상을 덮은 공명 어디에 쓰나,
從前錯怨天公 (종전착원천공)
이전에는 하느님을 오해하며 원망했네.
浩歌一曲酒千鍾 (호가일곡주천종)
호탕한 노래 한 곡에 술이 천 잔이라.
男兒行處是 (남아앵처시)
남아가 가는 곳에
未要論窮通 (미요론궁통)
곤궁과 대통을 논할 필요가 없도다.
注釋
○ 臨江仙(임강선) : 당(唐) 교방곡명(教坊曲名)으로 후에 사패(詞牌)가 되었다. 송나라 유영(柳永)이 처음 지은 것으로 송사가운데 산사(散詞)에 속한다. 쌍조(雙調) 62자이며, 본래는 임과의 이별 후의 슬픔을 노래한 내용이다.
北邙山: 하남 낙양현 북쪽에 있다. 고대 왕후공경들이 이 산에서 장사를 지냈다.
底用: 어찌 쓰고 어떻게 쓰나.
窮: 곤궁.
通: 통달. 즉 운이 좋다. 운수가 트이다.
譯文
옛날부터 지금까지, 똑 같은 황토 먼지 길을 걸어갔던 많은 영웅들,
지금은 모두 늙어 죽어 황토로 변했다.
인생길에 유유히 긴 恨은 마치 동쪽으로 흐르는 물처럼 종래 쉬지 않는다.
참기 어려운 심정을 누구에게 밝혀보나,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니, 다만 눈빛은 하늘가 돌아가는 기러기만 따라간다.
설령 절세의 공명을 얻었더라도 어디에 쓸 것인가,
전에는 정말로 하느님을 오해하며 원망하였도다.
나로 하여금 높게 노래 한 곡 불러 천 잔의 술을 마시게 하라.
남자가 되어, 일을 함에 도량이 크고 확 트여야지,
어떤 곤궁과 통달도 이에 관여하면 안 된다.
*元好問
금말원초의 문학가, 시인, 역사가. 자는 유지(裕之). 호는 유산(遺山). 금나라의 사적을 채록하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원유산선생집(元遺山先生集), 중주집[1] 따위가 있다.
무협팬들에게는 신조협려에서 이막수가 읊는 시인 안구사의 저자로 유명하다.
그의 선조는 북위의 황실 원씨로[2] 장종 명창(明昌) 원년인 1190년에 흔주에서 태어났다. 금사 열전에 따르면, 원호문은 겨우 7살 나이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다. 14세 이후, 원호문은 능천의 학천정(1161~1217)을 스승으로 모시며 공부했고[3], 경전, 역사, 제자백가를 두루 공부했다. 17세 때 숙부 원격이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원호문이 19세로 공부를 마칠 때까지 능천에서 살다가 그 후 그곳을 떠났다. 이때 《기산箕山》, 《금대琴台》같은 작품을 썼는데, 아직 원호문이 나이도 어리고 따로 벼슬을 하지 않아 명성이 널리 퍼지기 전이었음에도 조정의 예부(禮部)에 있던 조병문(趙秉文) 같은 사람들은 원호문의 작품을 보고 "근래에 이런 훌륭한 작품은 있었던 적이 없다." 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여 명성이 수도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이런 젊은 기재 원호문이 무언가 뜻을 펴보기 전인 1211년, 아직 원호문이 21살일 때 칭기즈 칸 세력이 금나라를 침노하였다. 학문을 배우고 이제 세상에 나가려고 할 때부터 눈에 보이는 천하는 이미 도탄에 빠졌다.
금나라와 몽골의 첫 전쟁은 몇 번 큰 싸움 끝에 다시 물러나는 등 간헐적으로 펼쳐졌는데, 이 무렵 원호문의 아버지가 사망했다. 원호문은 고향인 산서성 흔주(忻州)로 아버지의 유해를 가져와서 거기서 몇년간 복상한다. 몇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아버지의 복상이 끝날 무렵이 되어 다시금 원호문이 세상에 나갈 상황이 되었지만, 이때 다시 한번 몽골의 침입이 이어졌다.
1214년, 원호문이 24살일때 칭기즈 칸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 등과 함께 금나라를 유린했다. 몽골군은 산서 지역에도 들어왔고, 마침내 원호문의 고향까지 당도했는데 몽골군은 눈앞에 있는 모든걸 불태우고 학살했다. 이때 원호문은 양곡(陽曲) 지역으로 피난을 떠난 상태였다. 하지만 원호문의 형인 원호고(元好古)는 고향에 남아 침략군인 몽골군과 맞서 싸우던 도중에 전사하고 말았다. 나이가 고작 29세에 불과했으니, 아직 한창 나이였던 셈. 이때 혼주에서 죽은 사람만 무려 10여만 명에 달했다. 고향이 문자 그대로 지도에서 지워지고, 부모를 잃은지 얼마 안되어 젊은 나이의 형까지 잃은 상태로 원호문은 정처 없이 피난을 떠났다.
이후 금나라는 연경에서 개봉(카이펑)으로 천도했고 몽골은 남쪽으로 이동한 금나라의 행동을 '몽골에 대항하려는 행위'로 여기며 다시 침공을 개시했다. 이 무렵 원호문은 과거 시험을 준비했지만, 잘 되지 않아 낙방하여 풀이 죽은 상태였는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고향은 이미 몽골군의 침입 루트에 있어 또 다시 초토화가 되었다. 때문에 원호문은 과거에 떨어진 상태로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한채, 숭산 근처에 전답을 구해서 여기서 직접 농사를 짓고 독서를 하면서 지냈다.
금선종 흥정(興定) 5년(1221)에 원호문은 32세 나이로 마침내 진사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과거 시험장의 분쟁으로 인해 '원씨당인(元氏党人)'으로 모함을 받자 분노하여 벼슬을 거부했다. 그로부터 3년 뒤 원호문은 조병문 등의 추천을 받았고 시험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이로써 그는 벼슬에 나아갔고, 유림랑(儒林郎), 국사원편수(國史院編修)를 지냈으며, 진평(鎮平), 남양(南陽), 내향(內鄉)의 현령으로 벼슬살이를 하였다.
36세가 되던 1225년, 원호문은 적막한 관직 생활에 불만을 품고 장기 휴가를 청해 등봉으로 갔다. 이때 그는 자신의 중요 저서 『두시학(杜詩學)』을 저술했다. 이후 도성으로 가서 금나라의 중앙 정부에서 상서성의 연(掾), 영사(令史)를 맡아 가족들이 모두 변경(汴京, 현 허난성 카이펑)으로 이사하였다. 이후 좌사도사(左司都事)로 상서성 내 기구 좌사(左司)의 모든 일을 맡았고, 상서성좌사원외랑(尚書省左司员外郎)이 되었다.
이후 전쟁이 격화되자 조정이 떠난 개봉성은 얼마간 항전 후 곧 몽골군에 항복했다. 몽골군은 남아있던 고관들이나 주료 관료들은 포로로 잡아 끌고갔고, 나머지 일반 백성들도 노예로 삼을 만한 사람을 잡아서 끌고갔다. 원호문 역시 그렇게 끌려가서 산둥성 서부의 요성(랴오청)에 가족들과 함께 유폐되었다. 원호문이 요성에 갇힌 동안 금나라는 멸망했다. 2년 동안 요성 생활이 끝난 이후론 고향에 은거하여 죽을 때까지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술은 금사 편찬에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