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洛橋晩望/唐 孟郊

시뜨락 시정(詩庭) 2024. 12. 23. 05:11

낙교만망洛橋晩望/당唐 맹교孟郊
<낙교에서 저녁에 바라보며>

天津橋下冰初結 (천진교하빙초결)
천진교 다리 아래엔 얼음이 처음 얼고
洛陽陌上人行絕 (낙양맥상인행절)
낙양성 거리에는 나다니는 사람 없네
榆柳蕭疏樓閣閒 (유류소소루각한)
잎 진 비술나무 버드나무 조용한 누각
月明直見嵩山雪 (월명직견숭산설)
밝은 달 아래 눈 덮인 숭산 바로 보이네

*맹교(孟郊 : 751~814)는 절강성 호주(湖州) 무강(武康) 사람인데 선대가 낙양서 산 연고로 젊었을 때 숭산에서 은거한 적이 있다. 소식은 맹교의 시풍을 ‘차다[寒]’는 글자로 평가하였다. 이는 맹교가 생계를 돌보지 않아 가난하게 산 것과 관련이 있다. 한유는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서 ‘시대와 맞지 않아 불평(不平)하기 때문’이라 진단하였다. 당시 세속과 잘 맞지 않은 개결한 성품도 한 원인이었다.

맹교는 46세에 과거에 급제한 뒤에 율양 위(溧陽尉)로 간 적이 있었다. 한유가 위의 글 마지막 부분에 말한 대로 맹교는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가보니 이름난 명승지들이 있어 맹교는 이런 곳을 찾아다니며 술을 먹고 금(琴)을 연주하고 시를 쓰느라 공무를 소홀히 했다. 현령이 이를 부주(府州) 장관에게 보고하여 대리 1명을 파견하는 대신 맹교의 급여를 절반으로 깎았다. 이런 일로 맹교는 벼슬을 그만두고 낙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낙양에서는 마침 문인 이고(李皐)가 날마다 술자리를 벌여 초대하고 절도사인 정여경(鄭餘慶)에게 소개해 주어 그의 참모로 일하다가 64세로 죽게 된다.

이런 일화에서 보듯이 맹교는 주로 자신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삶을 산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세상과 거리가 생기고 그에 따라 자연 가난하게 되며 시풍도 당시 유행하던 세속적인 경향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지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맹교의 시 중에서 후대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천진교는 제목에 쓴 낙교를 말하는데 이는 본래 수양제가 건립한 것이다. 그는 낙양 도성에 낙수(洛水)를 끌어들이고는 이를 은하수에 비견하였기 때문에 천진(天津)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낙양을 ‘천상의 도시’, 즉 지상의 낙원으로 만들려고 한 의도를 알 수 있다. 조선도 고종 때 덕수궁 정문을 대한문(大漢門)이라 하였는데 이는 바로 한양을 천상의 도시로 새롭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작명이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은 왜 대한제국인데 한 나라 한(漢) 자를 쓰냐고 따지지만, 사실은 ‘한 나라 한(漢) 자’를 쓴 게 아니라 ‘은하수 한(漢) 자’를 쓴 것이다. 한양의 기원이 된 한강 자체가 은하수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