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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그네-김현승

시뜨락 시정(詩庭) 2024. 12. 11. 08:42

<겨울 나그네-김현승>

내 이름에 딸린 것들
고향에다 아쉽게 버려두고
바람에 밀리던 플라타나스
무거운 잎사귀 되어 겨울길을 떠나리라

구두에 진흙덩이 묻고
담쟁이 마른 줄기 저녁 바람에 스칠 때
불을 켜는 마을들은
빵을 굽는 난로같이 안으로 안으로 다스우리라

그곳을 떠나 이름 모를 언덕에 오르면 나무들과 함께 머리 들고 나란히 서서 더 멀리 가는 길을 우리는 바라보리라

재잘거리지 않고
누구와 친하지도 않고
언어는 그다지 쓸데없어
겨울옷 속에서 비만하여 가리라

눈 속에 깊이 묻힌 지난 해의 낙엽들같이
낯설고 친절한 처음보는 땅들에서
미신에 가까운 생각들에 잠기면
겨우내 다스운 호올로에 파묻히리라

얼음장 깨지는 어느 항구에서
해동의 기적소리 기적(奇蹟)처럼 울려와 땅속의 짐승들 울먹이고
먼 곳에 깊이 든 잠 누군가 흔들어 깨울 때까지

*김현승 (金顯承, 1913-1975)

Alexander Kremer (알렉산더 크레머, 19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