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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野之戰 과 姜太公

白雲 2024. 7. 6. 06:35

<牧野之戰 과 姜太公 이야기>
-시경 大雅.大明
牧野洋洋,檀車煌煌,駟聊彭彭。
維師尚父,時維鷹揚。
凉彼武王,肆伐大商,會朝清明。
목야의 들판은 넓고
박달나무 수레 찬란하고
검붉은 네 마리의 말은 장대하다네
태공망은 마치 매가 나는 듯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정벌하니
전쟁하던 날 아침은 맑고 밝았네

*周 無王의 연합군이 殷(=尙나라)의  폭군 紂(주)와 대결전을 치른 곳이 牧野로 지금의 衛輝(위휘)다 이 전투에서 승리로 은이 멸망하고 周가 건국 하는데 혁혁한 功을 세운 姜太公이 바로 이곳 출신이다 강태공의 호칭은 후에 붙여진 별칭이고 본래는 모계의 姓 은 '姜'  부계의 氏는 '呂' 이름은 '尙' 자는 '子牙' 이다. 그래서 姜子牙 또는 呂尙으로 부르며 때때로 姜尙 이나 呂牙 불리기도 한다.  큰 꿈을 품고 천문지리를 공부하고 병법을 연구하며  어려운 살림에 부인마져 이혼하고 떠나가 버린 나날 마침네 70을 넘긴 나이에서야 빛을 보게된다 그가 周나라에서 가까운 磻溪 라는 곳에서 낚시를 했는데 그것이 곧은 낚시 바늘에 미끼도  없는지라 미친 노인네의 소문이 퍼졌다 당시 은나라 폭군 紂로 인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려는 뜻을 갖고 천하의 인재를 모으던 周 성왕 문왕의 귀까지 이 소문이 들어가게  되자 문왕은 그를 만나 대화를 해보고  그가 바로 바라고 기다리던 인재임을 직감 스승으로 모시고 국정을 쇄신 군대를 길러 훗날을 도모하니 아들 무왕에 이르러 은나라를 뒤엎고 새로운 주나라를 세우는데 강태공의 절대적인 도움이 있었다. . 무왕이 그를 제나라의 왕으로 봉한 뒤에도 그는 임지로 가지 않고 조정에 남아 나라가 안정될 때까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왕을 보좌 했다. 문왕, 무왕, 성왕도, 강왕까지 네명의 황제를 보좌한 주나라 최고의 충신 강태공은 마침내 강왕 6년에 파란만장한 삶을 접으니 향년 139세였다.
*후에 붙혀진 별칭은 姜太公 외에 문왕이 바라고 기다리던 인재 라는 뜻의 太公望 도 있다

[참조] 김성곤의 중국한시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