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천일야화 미인탐방
허난설헌(許蘭雪軒) <제1話>
여자에게도 과거제로 국가인재를 등용시켰다면 허난설헌(본명 초희楚姬· 호 난설헌蘭雪軒· 자 경번景樊)이 여자 율곡이라고 불리었을 것이다. 그녀의 천재성으로 보아 과거에 참여했었다면 장원은 따 놓은 당상이 뻔해서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는 9번 과거에서 모두 장원으로 호조좌랑의 첫 벼슬길에 올랐다. 1558년(명종13년) 8월 명경과에 역수책(易數策)으로 장원급제하여 순수사림에서 세상살이로 나왔다. 율곡을 두고 문과 모두에서 장원을 했다하여 구장(九 場)장원, 또는 구도(九度)장원이라고 하여 세상에 회자되었다. 그때 율곡의 나이 27세에 불과하였다.
허난설헌은 하늘을 나는 봉황이었는데 새장에 갇힌 삶을 살았다. 15살에 두 살 연상인 김성립(金誠立·1562~1592)과 1577년(宣祖10년)에 결혼하여 13년을 살다간 짧은 인생에서 주옥같은 시 300여수와 산문·수필 등을 남겼으나 213수 정도만 현재 전해지고 있다.
아마 그미(그녀의 이칭)는 꿈과 낭만이 가득한 선계(仙界)로 갔을 것이다. ‘구슬 꽃 산들바람 속에 파랑새가 날더니/ 서왕모는 기린수레타고 봉래 섬으로 가시네/ 난초 깃발 꽃 배자에다 흰 봉황을 타고/ 웃으며 난간에 기대 요초를 뜯네/ 푸른 무지개 치마가 바람에 날리니/ 옥고리와 노리개가 쟁그랑 소리를 내며 부딪치네/ 달나라 선녀들은 쌍쌍이 거문고를 뜯고/ 계수나무 위에는 봄 구름이 향기러워라/ 동틀 무렵에야 부용각 잔치가 끝나/ 붉은 퉁소 소리에 오색노을이 걷히자/ 이슬 젖은 은하수에 새벽 별이 지네’ ≪신선세계를 바라보며≫다.
천재 여류시인의 너무 짧은 삶이었다. 결혼생활 13년에 임신을 세 번 했으나 후손은 없다. 첫째는 유산을 했고 남매는 어릴 때 어미 곁을 떠나 그미의 장례식엔 상주가 없었다.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 땅에/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네 무덤 앞에다 술잔을 붓는다/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밤마다 서로 따르며 놀고 있을테지/ 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나기를 바라랴/ 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 피눈물 슬픈 울음을 속으로 삼키네...’ ≪아들 죽음에 곡하다≫다. 자식을 앞세운 어미의 가슴 메어지는 슬픔을 오롯이 담았다.
난설헌은 조선 땅에 태어난 것과 여자로 태어난 것, 그리고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등 세 가지를 평생 후회했다고 하였다. 천재 여류시인의 절규다.
그미가 대장부로 태어났던들 성리학의 나라인 남성 주도 조선사회에서 실력에 걸맞은 사대부로 활동을 했을 것이다. 또한 김성립이 아닌 헌헌장부 최순치나 대시인 이달을 빼어 닮은 어느 사대부와 결혼을 했었다면 27세란 그토록 짧은 인생을 그렇게 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난설헌은 일찍 가도 너무 일찍 이승을 떠났다.
‘자주빛 퉁소 소리에 구름이 흩어지자/ 발 밖에는 서리가 차가워 앵무새가 우짖네/ 밤 깊어져 외로운 촛불이 비단 휘장을 비추고/ 이따금 드뭇한 별이 은하수를 넘어가네/ 똑똑 물시계 소리가 서풍에 메아리치고/ 이슬지는 오동나무 가지에선 밤 벌레가 우네/ 명주 손수건에 밤새도록 눈물 적셨으니/ 내일 보면 점점이 붉은 자국이 남았으리라...“ ≪임을 그리며≫다.
난설헌은 결혼은 했어도 평범한 남녀가 꿈꿨던 사랑의 달콤한 삶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난설헌과 김성립은 어울리는 원앙이 되지 못하였다. 안동김씨는 5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한 명문가문을 이루었다. 하지만 김성립은 수차례에 걸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을 거듭했다.
이 같은 집안 상황에 그미는 시어머니 송(宋)씨와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집안의 절애고도인 별당에 살고 있는 새색시 그미는 남편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다. 위의 시 ≪임을 그리며≫는 읽은 이 마다 다양한 해석을 낳게 하는 시다.
여기서 임이란 남편 김성립을 지칭 했다면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으면 그리운 임으로 형상화 되었을까? 아니면 시의 세계에서 선망하고 가슴 졸이는 어떤 사대부가 대상이었으리라!
그미는 당시 세상에서 알아주는 신동이었다. 8살 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을 정도의 세기적 천재로 평가되었다. 석학인 초당(草堂) 허엽(許曄·1517~1580)의 삼남삼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나 금지옥엽으로 컸다.
위로는 큰오빠 허성(許筬), 둘째오빠 허봉(許篈) 아래는 후에 ≪홍길동전≫으로 이름을 날린 허균(許筠)이었다. 허엽은 조강지처 청주 한씨한테서 두 딸과 허성을 얻었고 재취한 강릉 김씨에게서 두 아들과 천재소녀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허초희를 얻었다.
그의 일가는 뛰어난 문재(文才)로 삼허(三許), 또는 사허(四許)와 오허(五許)로까지 불렸다. 삼허는 아들 삼형제를 지칭함이며 사허는 삼형제와 아버지, 그리고 오허는 천재소녀 초희 까지를 포함한 호칭이었다.
하지만 그미의 결혼생활은 질곡의 나날이었다. 고부간의 갈등이 있을 때 남편의 위로가 있어야 했거늘 김성립은 그 역할을 해내지 못하였다. 요즘말로 하면 마마보이였던 것 같다.
시 나부랭이나 쓴다고 남편을 무시하는 듯하는 표정으로 읽은 김성립은 그미를 버거워 했으며 신비롭고 꿈속 같은 신혼 방에도 가뭄에 콩나듯 들려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사내역할을 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천재 여류시인 그미는 시와 선계에서 고추보다 매운 시집살이의 시름과 고독을 달랬다.고통 속에서도 예술의 꽃은 신비롭고 화려하게 피어났다.
‘오동나무 한 그루가 역양에 자라나/ 차가운 비바람 속에 여러 해를 견뎠네/ 다행이도 보기 드문 장인을 만나/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었네/ 다 만든 뒤 한 곡조를 타 보았건만/ 온 세상에 알아들을 사람이 없네/ 이래서 광릉산 묘한 곡조가/ 끝내 전해지지 않고 말았나 보네’ ≪내 소리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네≫다.
(시 옮김 허경진) 성리학 외에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하는 남성절대사회에 대한 원망의 시인 듯하다. 성질대로라면 그미는 백마를 타고 삼천리금수강산을 봉황처럼 하늘을 훨훨 날아 본 대로 느낀 대로 시의 세계를 펼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