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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유치환

시뜨락 시정(詩庭) 2025. 12. 6. 06:46

행복-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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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살 기혼자인 청마 유치환은 29살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를 사랑했다.
세간은 플라토닉 사랑이라 한다.
청마와 정운이 처음 만난 곳은 각각 국어교사와  가사교사로 있던 통영여자중학교

이때 이영도는 17세에 결혼하여 2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딸 하나가 있었다.
단아하고 지적인 이영도를 청마는 흠모했다. 또 그녀의 오라비가 당시 유명한 이호우 시조 시인이었으니 문학적 관심도 인연이 되었으리라.

청마는 1947년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 눈감고 계십니까?
내가 미련합니까?
미련하다 미련하다 우십니까?'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도 청마를 향해 움직였다.
청마가 기혼자여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그러기에 직장이나 집에서 편지를 쓰기보다 우체국에서 쓰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이영도 역시 연민을 입 밖으로 내어놓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훗날 '연인'이라는 시로도 알려진 시조가 '무제 無題'였다.

'진정 마음 외로운 날은
여기나 와서 기다리자
너 아닌 숱한 얼굴들이 드나드는
유리문 밖으로
연보라빛 갯바람이 할 일 없이 지나가고
노상 파아란 하늘만이 열려 있는데
-우편국에서 / 유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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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통영우체국(현 통영중앙동우체국)

이 우체국은 현재 통영중앙우체국으로
문패를 청마우체국으로 바꿔달기 위한 개명작업이 추진 중으로 청마거리와 함께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아프고도 애틋한 관계'이지만 이들의 플라토닉적(?)인 사랑은 오래 이어지고 깊었다.
편지는 청마 유치환이 1967년 2월 귀가 중 버스에 치여 별세할 때까지 이어진다.

이영도는 연모 어린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 이영도는 이 편지 중 200통을 추려 1967년 출간한다.
청마의 '행복'이라는 시에서 한 구절을 따온 제목의 책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 이다.

'무제1(연인) ㅡ이영도(1916~1976)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그래도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이 시를 읽으면 황진이와 서경덕이 주고받은 시조가 생각난다.
어쩌면 사제라는 한계가 있었던 황진이보다 기혼남녀라는 한계가 컸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들의 공통 주제는 그리움으로 통한다.

이영도 / 유치환


'그리움ㅡ 유치환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아래 거리건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긴 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다
오오~
너는 어디에 꽃같이 숨었느뇨'

'그리움 ㅡ   이영도

생각을 멀리하면 잊을 수도
있다는데
어느새 가슴 깊이 자리 잡은
한 개 모래알
가다가 월컥 한 가슴
밀고 드는 그리움.'

'그리움(2) ㅡ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누구나 간직하는 그리움이 있다. 대개는 아득해지는 먼 그리움은 잔잔하고 부드럽다.
가장 강력한 그리움이 있다면 지금의 사랑이 사라졌을 때일 것이다.
혹여 그것이 아픔이라면 고통을 수반한 그리움이니 아늑하지 않겠지만.

청마가 죽고 이영도가 서간집을 내었을 때는 행복이 아니라  과거 행복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그 책을 부여잡고 조용히 몇 번이고 울었을 것이다.

시조시인 이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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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 라는 제목의 책 소개글에서 청마 유치환(靑馬 柳致環) 선생의 애틋한 연애사를 접하고 사회규범으로는 용인 되기 어렵지만 인간 내면으로 보면 그지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기에 그 내용 일부를 추려 옮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