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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征-杜甫

白雲 2024. 12. 9. 07:14


북정(北征)-두보(杜甫)

一. 奉詔探親
<황제에게서 휴가를 얻어 가족을 찾아가다>

皇帝二載秋(황제이재추)
황제 재위 2년 되는 가을
閏八月初吉(윤팔월초길)
윤팔월 초하룻날 좋은 날씨
杜子將北征(두자장북정)
나 두보는 북으로 나아가
蒼茫問家室(창망문가실)
멀리 가족을 찾아보련다
維時遭艱虞(유시조간우)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朝野少假日(조야소가일)
조정과 민간에 한가한 날 드물다
顧慙恩私被(고참은사피)
돌아보건데 부끄럽게도 나만 은총 입어
詔許歸蓬蓽(조허귀봉필)
집에 돌아가는 것 허락받았다.
拜辭詣闕下(배사예궐하)
대궐 아래 나아가 하직 여쭙고
怵惕久未出(출척구미출)
떨리는 마음에 오래도록 나오지 못했네
雖乏諫諍資(수핍간쟁자)
내 비록 간쟁의 자질 모자라지만
恐君有遺失(공군유유실)
황제께 잘못 있으실까 두렵기만 하다.
君誠中興主(군성중흥주)
황제께서는 참으로 중흥의 임금님
經緯固密勿(경위고밀물)
나라 일에 진실로 애를 쓰셨다네
東胡反未已(동호반미이)
동쪽 오랑캐 반란이 그치지 아니하니
臣甫憤所切(신보분소절)
나 두보는 이것이 심히 분통스럽다.
揮涕戀行在(휘체련행재)
눈물 뿌리며 행재를 그리니
道途猶恍惚(도도유황홀)
가는 길이 오히려 어질어질하다.
乾坤合瘡痍(건곤합창이)
하늘과 땅은 모두 상처투성이
憂虞何時畢(우우하시필)
근심 걱정 언제 끝날 것인가?

二. 歸家途中的 見聞和感受
<귀가 도중 보고 들은 것에 대한 감상>

靡靡踰阡陌(미미유천맥)
느릿느릿 논과 밭 넘어가니
人煙眇蕭瑟(인연묘소슬)
연기 오르는 집은 드물어 쓸쓸하다.
所遇多被傷(소우다피상)
만나는 사람은 부상당한 사람이 대부분이고
呻吟更流血(신음갱유혈)
신음하면서 또한 피를 흘린다.
回首鳳翔縣(회수봉상현)
고개를 봉상현으로 돌리니
旌旗晩明滅(정기만명멸)
깃발들은 저녁 빛에 보였다 사라졌다 한다.
前登寒山重(전등한산중)
차가운 앞산을 거푸 오르니
屢得飮馬窟(누득음마굴)
말에 물먹일 동굴도 여러 곳 만났다.
邠郊入地底(빈교입지저)
빈주의 성밖은 움푹 꺼져있고
涇水中蕩潏(경수중탕휼)
경수의 물줄기는 그 속에서 세차게 흐른다.
猛虎立我前(맹호립아전)
사나운 범이 내 앞에 서서
蒼崖哮時裂(창애효시렬)
울부짖으니 절벽이 갈라지는 듯하다.
菊垂今秋花(국수금추화)
국화는 이제 가을꽃으로 피어있고
石戴古車轍(석대고거철)
바위에는 옛날 수레자국 나있다.
靑雲動高興(청운동고흥)
푸른 하늘구름에 높은 흥취 일고
幽事亦可悅(유사역가열)
골짜기의 일들이 즐거워할 만하도다.
山果多瑣細(산과다쇄세)
산의 열매는 하찮은 것이 많지만
羅生雜椽栗(나생잡연률)
늘어선 온갖 도토리와 밤이 많기도 하다.
或紅如丹砂(혹홍여단사)
단사처럼 빨간 것도 있고
或黑如點漆(혹흑여점칠)
옷칠처럼 까만 것도 있다.
雨露之所濡(우로지소유)
비와 이슬에 젖어
甘苦齊結實(감고제결실)
달게도 익었고 쓰게도 익었다.
緬思桃源內(면사도원내)
멀리 복사꽃 피는 고을을 생각하니
益歎身世拙(익탄신세졸)
어설픈 내 신세가 더욱 한탄스럽다,
陂陀望鄜畤(피타망부치)
높고 낮은 부주의 산들
巖谷互出沒(암곡호출몰)
바위와 골짜기 나타났다 사라졌다 아득하다.
我行已水濱(아행이수빈)
나는 이미 강가를 걷고있지만
我僕猶木末(아복유목말)
내 종은 아직 나무 끝에 가려져 있다.
鴟鳥鳴黃桑(치조명황상)
올빼미는 누런 뽕나무에서 울고
野鼠拱亂穴(야서공난혈)
들쥐는 어지러운 구멍에서 인사한다.
夜深經戰場(야심경전장)
밤이 깊어 전쟁터를 지나가니
寒月照白骨(한월조백골)
차가운 달이 백골을 비친다.
潼關百萬師(동관백만사)
동관을 지키던 백만 대군들
往者散何卒(왕자산하졸)
지난번에 흩어져 달아남이 어찌 그렇게도 빨랐는가?
遂令半秦民(수령반진민)
마침내 진나라 백성의 절반을
殘害爲異物(잔해위이물)
죽여서 저승의 귀신을 만들었다

三. 到家以後的 情況
<부재 중에 자기 집안이 당한 곤궁한 생활>

況我墜胡塵(황아추호진)
더구나 나는 오랑캐의 티끌에 떨어졌다가
及歸盡華髮(급귀진화발)
돌아와 보니 모두가 머리가 희끗희끗해졌구나!
經年至茅屋(경년지모옥)
해를 넘겨 내 초가집에 이르니
妻子衣百結(처자의백결)
아내와 자식의 옷은 누더기다.
慟哭松聲廻(통곡송성회)
통곡의 소리는 솔바람에 감돌고
悲泉共幽咽(비천공유열)
슬픔은 샘물과 함께 목이 메어 운다.
平生所嬌兒(평생소교아)
평소에 귀여움 받던 사내아이
顔色白勝雪(안색백승설)
흰 얼굴이 눈보다 더하다.
見耶背面啼(견야배면제)
애비를 보자 돌아서서 우는데
垢膩脚不襪(구니각불말)
때 묻은 발에는 버선도 신지 않았다.
牀前兩少女(상전양소녀)
침상 앞의 두 계집아이
補綻才過膝(보탄재과슬)
기운 옷이 터져 겨우 무릎을 가린다.
海圖柝波濤(해도탁파도)
바다 그림에는 물결이 동강나 있고
舊繡移曲折(구수이곡절)
옛날에 놓은 수가 굽어 옮겨진 까닭이네
天吳及紫鳳(천오급자봉)
천오와 보랏빛 봉황새
顚倒在裋褐(전도재수갈)
짧은 저고리 위에 거꾸로 서있다.
老夫情懷惡(노부정회오)
노부는 속이 언짢아
嘔泄臥數日(구설와수일)
토하고 싸면서 며칠이나 몸져누었다.
那無囊中帛(나무낭중백)
어찌 자루 속에 비단이 없어
救汝寒凜慄(구여한늠률)
너희들 추위를 막아 주지 못할까?
粉黛亦解苞(분대역해포)
분과 눈썹먹도 보퉁이에서 나오고
衾裯稍羅列(금주초나열)
요와 이불도 슬쩍 펼쳐진다.
瘦妻面復光(수처면부광)
수척한 아내 얼굴에 다시 빛이 돌고
癡女頭自櫛(치녀두자즐)
어리숙한 계집아이는 머리를 혼자 빗는다.
學母無不爲(학모무불위)
어미를 본받아 못하는 짓이 없어
曉粧隨手抹(효장수수말)
아침 화장에 마구 찍어 바른다.
移時施朱鉛(이시시주연)
잠시동안 분 바르고 곤지 찍으니
狼藉畵眉闊(낭자화미활)
널따란 눈썹 그린 것이 요란도 하다.
生還對童稚(생환대동치)
살아와서 어린 것들을 대하니
似欲忘飢渴(사욕망기갈)
배고픔과 목마름을 거의 잊어버리고 싶다.
問事競挽鬚(문사경만수)
지난 일을 물으며 다투어 수염을 당기지만
誰能卽嗔喝(수능즉진갈)
누가 곧 화내고 호통을 칠 수 있는가?
翻思在賊愁(번사재적수)
문득 적에게 잡혀서 있던 때를 생각하니
甘受雜亂聒(감수잡란괄)
복잡하고 시끄러움도 달게 받아들여진다.
新歸且慰意(신귀차위의)
새로 돌아온 일만도 위로가 되는데
生理焉能說(생리언능설)
생활의 법도 같은 것을 어찌 마마 말할 수 있겠는가?

四. 縱論時情 分析形勢
<정치현황에 관한 의견과 분석>

至尊尙蒙塵(지존상몽진)
황제께서는 아직도 피난살이
幾日休練卒(기일휴련졸)
어느 날에나 전쟁이 끝날까?
仰觀天色改(앙관천색개)
우러러 하늘을 보니 하늘빛이 변하여
坐覺妖氛豁(좌각요분활)
요사한 기운 점차 사라지는 모습을 앉아서 느낀다.
陰風西北來(음풍서북래)
서북쪽에서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
慘憺隨回紇(참담수회흘)
따르는 회흘의 군사들이 참담하다.
其王願助順(기왕원조순)
그 임금은 우리를 돕고싶다 하며
其俗善馳突(기속선치돌)
그 습속은 내달리는 일에 뛰어나다 한다.
送兵五千人(송병오천인)
보내 준 병사는 오천 명
驅馬一萬匹(구마일만필)
거기에다 군마는 일만 필이다.
此輩少爲貴(차배소위귀)
이 무리들은 젋은이를 귀히 여기니
四方服勇決(사방복용결)
세상은 용감하고 과감한 행동에 탄복한다.
所用皆鷹騰(소용개응등)
싸움에 쓰여서는 솔개는 하늘을 날고
破敵過箭疾(파적과전질)
적을 무찌름이 화살보다 빠르다.
聖心頗虛佇(성심파허저)
황제께서는 잠시 우두커니 바라보지만
時議氣欲奪(시의기욕탈)
당시의 의논으로는 그 기세로 탈환할 것 같았다.
伊洛指掌收(이락지장수)
이수와 낙수는 쉽사리 손에 들어올 것이고
西京不足拔(서경부족발)
서경은 공격할 것도 없다.
官軍請深入(관군청심입)
우리 군사도 제발 깊이 들어가
蓄銳可俱發(축예가구발)
정예를 모아 함께 출정하여
此擧開靑徐(차거개청서)
이 번 싸움으로 청주와 서주를 열고
旋瞻略恆碣(선첨략긍갈)
항산과 갈석산을 겨냥해야한다.
昊天積霜露(호천적상로)
하늘에는 서리와 이슬 내리고
正氣有肅殺(정기유숙살)
정기에 엄숙한 살기가 서려있다.
禍轉亡胡歲(화전망호세)
재앙을 극복하고 오랑캐를 쳐부수고
勢成擒胡月(세성금호월)
이 기세로 오랑캐를 사로잡으리
胡命其能久(호명기능구)
오랑캐의 운명 오래 갈 수 있을까?
皇綱未宜絶(황강미의절)
황제의 법통은 끊이지 아니하리라!

五. 總結 激勵肅宗重振王朝
<당왕조를 중흥시키기를 격려하는 마음으로 결론>

憶昔狼狽初(억석낭패초)
옛날 낭패하던 그 때 일을 생각하면
事與古先別(사여고선별)
역사에 없던 일이 일어났다.
姦臣竟菹醢(간신경저해)
간신은 끝내 소금에 절여졌고
同惡隨蕩析(동악수탕석)
악당도 같이 소탕되었다.
不聞夏殷衰(불문하은쇠)
듣지 못했는가? 하나라와 은나라가 망함에
中自誅妺妲(중자주말달)
말희와 달기를 스스로 베었다는 말을
周漢獲再興(주한획재흥)
주나라와 한나라가 다시 일어선 것은
宣光果明哲(선광과명철)
선왕과 광무제가 명철했기 때문이네
桓桓陳將軍(환환진장군)
훌륭하도다, 진장군이시여
仗鉞奮忠烈(장월분충렬)
군사를 이끌고 충성을 다했다.
微爾人盡非(미이인진비)
그대 아니면 사람들은 다 죽었고
于今國猶活(우금국유활)
그대 때문에 지금까지 나라가 있음이다.
凄凉大同殿(처량대동전)
처량한 대동전
寂寞白獸闥(적막백수달)
적막한 백수문
都人望翠華(도인망취화)
도성의 백성들이 비취 깃발 바라보니
佳氣向金闕(가기향금궐)
상서로운 기운은 황금 대궐 향한다.
園陵固有神(원릉고유신)
능묘에는 원래 신령이 살고 있으니
掃灑數不缺(소쇄수불결)
쓸고 닦아 제례를 거르지 말고.
煌煌太宗業(황황태종업)
태종의 업적 찬란하게 빛내라!

- 끝 -

*본 장편서사시 북정(北征)은 안사(安史)의 란이 발생한지 2년 째 되는 당숙종(唐叔宗) 지덕(至德) 2년(757) 가을 봉상현의 행재소에서 좌습유(左拾遺)의 직에 있던 두보가 숙종으로부터 휴가를 얻어 부주(鄜州)에 있던 가족을 찾아가기 위해 길을 떠나서 집에 당도할 때의 전후 시기의 집안 사정과 혼란에 빠진 백성들의 생활 및 정치현황에 대해 묘사했다. 부주(鄜州)는 봉상(鳳翔)에서 동북쪽으로 300키로 이상 되는 거리의 락수(洛水) 중류에 위치한 도시로써 시의 제명이 북정(北征)이 된 연유다. 전시의 내용은 집을 찾는 길에서나 집에 당도한 후에 직접 겪은 일들을 소재로 해서 안사의 란으로 인해 발생한 피폐된 백성들의 생활과 혼란에 빠진 당왕조의 정세를 서술하고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당시 두보의 처지는 일개 간관에 불과해서 숙종이 그의 간함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는 자기의 의무를 다하여 시로써 충간을 대신했다. 시에서는 국가의 대사와 개인사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설파하고 애국우민 사상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전 시는 7백자로 두보가 지은 오언고체시 중 가장 긴 장문의 시가다.

*두보(杜甫)
자는 자미(子美)고 호는 소릉(少陵)이다.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호북성(湖北省)의 양양(襄陽)이지만, 하남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유명한 관리이자 학자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出仕)하였으나 1년 만에 화주(華州)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畿內)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감숙성(甘肅省)의 진주(秦州) ·동곡(同谷)을 거쳐 사천성(四川省)의 성도(成都)에 정착하여 시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초당을 세웠다. 이것이 곧 두보초당 혹은 완화초당(浣花草堂)이다.
일시적으로는 지방 군벌의 내란 때문에 사천(四川) 동쪽의 재주(梓州) ·랑주(閬州)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완화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 무렵에 청두의 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료(幕僚)로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장강으로 내려가 사천성 동단(東端)의 기주(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협곡에서 나와, 이후 2년간 호북·호남의 수상(水上)에서 방랑을 계속하였는데,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동정호(洞庭湖) 호반에서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 ·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 ·백거이(白居易)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표작으로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北宋) 왕수(王洙)의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주석서(註釋書)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郭知達)의 《구가집주(九家集註)》는 훈고(訓뭍)에 뛰어났으며, 청(淸)의 전겸익(錢謙益)의 《두시전주(杜詩箋注)》는 사실(史實)에 상세하며,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杜詩詳註)》는 집대성으로서 편리하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시대에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황학(黃鶴) 보주(補註)의 《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 등이 복간(複刊)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成宗) 때는 유윤겸(柳允謙)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전역서(全譯書)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杜詩諺解)》를 간행하였으며, 또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두시(杜詩)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현대의 것으로는 이병주(李丙疇)의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1958), 양상경(梁相卿)의 《두시선(杜詩選)》(1973) 등이 알려져 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