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墨竹.梅鳥圖-尹用求

시뜨락 시정(詩庭) 2025. 8. 11. 11:43

墨竹 尹用求 作 종이에 수묵, 간송미술관 소장.

“밤에 들리는 비바람 소리
방에 누운 채 귀 기울이니
옥용의 읊음 같구나.
-석촌처사 윤용구

梅鳥圖 尹用求作 종이에 수묵

사계절 아름다운 흥취가 있는
초가집 연못가에
봄 매화가 처음 필 때

때마침 산새가 내려와
오랫동안 배회하다가
꽃을 물고 날아간다

발 넘어로 한번 감상하고는
먹물로 장난 삼아 그 모습을 그려
한낮의 잠을 견디려 한다.
-해관우인변제(解綰擾人弁題)

*윤용구(尹用求, 1853년 ~ 1939년)은 조선 말기의 문신, 화가로, 자는 주빈(周賓), 호는 석촌(石邨)· 해관(海觀)·수간(睡幹)·장위산인(獐位山人), 본관은 해평이다. 글씨와 글에 능한 서화가였다.
석촌은 조선말 고종때 문신(文臣)이며, 서화가 이다. 그는 공재 윤두서(恭齋尹斗緖)의 10대 손으로 1853년에 태어나 19세인 1871년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 이후 규장각 에 들어가 상대(常帶)·한림(翰林)·대교(待敎)· 직각(直閣)·사인부제학(舍人副提學)·이조참의 (吏議參議)· 대사성·도승지·예조판서·이조판서 에까지 이르렀다.
한일합방 후 일본이 주는 모든 남작를 거절하였다. 그는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서화와 거문고, 바둑으로 자오(自娛)하며 두문불출하였다. 그 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필묵에 의한 대와 난이며 문인예술이었다. 이는 무언의 항거였 다. 그러나 그의 정신만은 살아 있었다. 이는 곧 선비정신이다. 그는 주로 해관우창(解綰榎佾)·해관우인(解綰榎人)· 해관퇴초(解綰退樵)· 장위우인(莊擾人)· 석촌초수(石邨樵叟)·석 촌노초(石邨老樵)·석촌퇴초(石邨退樵)·석촌 거사(石邨居士)·석서경부(石墅耕夫)등의 아호 를 즐겨사용하였다. 이러한 아호는 그의 삶과 정신을 보여주는 단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