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암미술관에서는 삼성문화재단과 간송미술문화재단이 공동으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가 겸재 정선 의 작품들을 모아 사상 최대 규모의 특별전시회를 열고 국보 2점과 보물 57점을 합쳐 무려 165점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기에 이를 소개 관람을 추천합니다.
*겸재 정선 작품 특별전시회
2025.04.02~06.29.
호암미술관: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에버랜드로 562번길 38
국보 정선필 금강전도(鄭敾筆 金剛全圖)

겨울의 금강산 모습이다
금강산은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엔 개골산 으로도 불리우니 이 그림은 별칭 개골산에 이다.
겸재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한 작품에만 직접 화제시(畵題詩)를 짖고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칠언율시(七言律詩)로 그내용은
萬二千峯皆骨山 (만이천봉 개골산)
일만 이천 봉 겨울 금강 개골산
何人用意寫眞顔 (하인용의 사진안)
어느 누가 참모습 그리려고 하였는가
衆香浮動扶桑外 (중향부동 부상외)
뭇 향기는 동해 바다 밖으로 퍼지고
積氣雄譒世界間 (적기웅파 세계간)
그곳 쌓인 기운은 온누리에 웅장하게 펼쳐지네.
幾朶芙蓉□素□ (기타부용 □소□)
몇 송이 연꽃 봉오리는 해맑은 자태 드러내고?
半林松栢隱玄關 (반림송백 은현관)
소나무 잣나무 숲에 불당들이 가리어 있네.
從令脚踏須今遍 (종령각답 수금편)
직접 발로 곳곳을 답사해야만 두루 살펴 볼수 있겠으니
爭似枕邊看不慳 (쟁사침변 간불간)
이 작품을 베갯맡에 걸어두고 실컷 보는 것에 비할 수가 있으랴.
*미련(尾聯)에 직접 가보기 힘든 금강산의 비경을 그림으로 벼개맡에 걸어놓고 누워서 실컷보며 즐길수 있다는 것은 당시 사대부들의 꿈 인 와유(臥遊)이다
동해와 맞닿은 금강산의 위용을 한눈에 잘 드러낸 이 작품은 매우 세부적이고 사실적이다. 그림엔 정양사와 만폭동, 금강대와 사자바위, 보덕굴, 묘길상, 혈망봉과 가장 높은 봉우리인 비로봉까지 금강산의 명소가 다 들어가 있어 그 핍진함이 놀랠만하다.
정선은 이처럼 금강산 전체를 아우르는 금강전도뿐 아니라 각각의 명소도 따로 떼어 세부적인 작품도 그렸는데, 이것들을 모아 '신묘년풍악도첩'을 만들었다. 풍악이란 말이 들어갔으니, 가을 금강산이란 말이다. 신묘년 가을에 만든 이 화첩에는 총 13점이 들어있다.
정선은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복고등학교에 그의 생가터가 남아 있다). 대대로 선비 집안이었지만, 3대째 벼슬에 오르지 못해 가세는 형편없이 기울었고 설상가상 14살에 부친까지 사망하자 그는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정선은 먹고살기 위해 화가가 될 결심을 한다.
비록 몰락했지만 양반 집안이라 당시 유명한 문인 김창흡 밑에서 공부할 수 있었는데, 결국 이 집안의 도움으로 37세에 세자익위사라는 벼슬을 얻게 된다. 세자익위사는 세자가 행차할 때 앞에서 길을 내는 하급 관리다. 그리고 김창흡 문하생 시절 만난 친구가 그의 일생 브로맨스 파트너 이병연이다.
1711년, 이병연이 금강산 인근 금화현감으로 있으면서 스승 김창흡과 정선을 금강산 여행에 초대했고 이때 금강산을 여행한 정선이 '신묘년풍악도첩'을 만들었다.
다음 해 다시 금강산을 찾은 정선은 산과 바다(금강산과 동해)를 보며 그림을 그렸고 이병연과 김창흡은 시를 지었는데, 이를 합쳐 만든 것이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이다. 그때까지 무명 화가였던 정선은 이 화첩으로 인해 금강산을 가장 잘 그리는 작가로 급부상한다.
당시 선비들 사이에서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그것을 글로 기록하거나 그림으로 소장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정선의 그림이 이들을 위한 지도 역할을 했고 또 금강산의 경치를 집에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으로의 역할까지도 겸했으니, 그의 그림은 회화적인 측면과 실용적인 측면을 다 가진 것이다.
이후 정선은 다시 한번 해악전신첩을 완성하고자 72세의 나이에 다시 금강산을 방문해 더욱 완성된 작품을 그려냈는데(후 해악전신첩) 그 작품들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정선 이전의 그림을 말할 때 흔히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거론한다. 안평대군이 꾼 꿈을 안견이 재현한 이 그림은 실제 경치를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상상해서 그린 그림으로 이를 관념산수화라고 한다. 이 시대엔 중국의 영향으로 신선이 살 법한 산수를 상상해서 그리는 관념산수화가 일반적이었다. 이와 반대되는, 실제 경치를 보고 그린 그림을 실경산수화라고 부르는데, 이런 우리 산천은 고려시대부터 그려져 왔다. 그렇다면 실경산수화와 진경산수화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실경산수화는 기록에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에 반해 진경산수화는 기록뿐 아니라 회화의 기능, 즉 예술성을 지녔다는 데 그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실제 경치를 그린 그림은 정선 이전에도 있었지만, 정선은 예술성을 겸비한 그림을 그림으로써 진경산수화를 창시했다고 보는 것이다.
금강전도 이 그림은 첩첩산중인 금강산을 마치 손바닥에 올려놓은 것처럼 환히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려져 있다. 드론이 있을 리 만무한데 어떻게 이런 전경을 그릴 수 있었을까. 정선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조로 그리되 강조하고 싶은 곳은 과장하고 어떤 것은 과감하게 생략했다. 즉 실경이되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작가가 의도대로 그린 것이다.
국보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정선이 76세에 그린 인왕제색도(1751)이다. 고 이건희 회장 기증품으로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작품은 비 갠 후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우뚝 선 바위는 화강암으로 원래는 하얀색에 가깝다.
정선은 이 부분을 검게 칠해 비에 젖은 화강암을 표현했고 중간에 안개를 띠처럼 그려 여백을 만들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아름다운 고고함이 남아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도 위에서 보는 시점과 정면에서 보는 시점이 공존한다. 정선은 자기가 생각하는 인왕산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시점이 여러개인 다시점 을 쓴 것이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대로 그린 점, '다시점'을 쓴 것은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느를 떠오르게 한다. 따지고 보면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정선이 세잔느 보다 앞서있다. 그림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의 실제 경치를 '자기만의 시선과 생각'을 담아 그렸기에 그의 그림이 특별한 것이다.
친구 이병연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정선이 인왕제색도를 그렸다는 해석도 있다. 인왕산에 비가 개듯 친구의 병이 사라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정선의 바람이 무색하게 이병연은 그림이 완성되고 3일 만에 숨을 거둔다. 어린 시절 김창흡의 문하생으로 만나 함께 금강산을 유람했고,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편지를 주고받았던 친구의 죽음 앞에 정선의 심경은 어땠을까.
*인왕제색도 는 해외전시 관계로 5윌 4일 이전 까지만 볼수 있다. 筆者 는 운 좋게 철수전에 볼수 있어 그 때의 압도적인 감동의 여운을 아직도 누리고 있습니다.
시화환상간도'(詩畵換相看圖)

시화환상간도 에는 "내 시 자네 그림 서로 바꿔 봄에, 그 사이 경중을 어이 값으로 논하여 따지겠는가. (我詩君畵換相看, 輕重何言論價開)"라는 이병연의 시를 겸재가 써 놓았다.
1741년 양천현감으로 제수된 정선이 떠나 던 날 이병연은 이렇게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 한다.
"贈別鄭元伯
爾我合爲王輞川
畫飛詩墜兩翩翩
歸驢已遠猶堪望
怊悵江西落照天
정원백(元伯)과 이별하며
나와 그대가 합해야 왕망천이 되는데
그림 날고 시 떨어지니 둘이 다 퍼덕이네
돌아가는 나귀 멀어져도 아직은 보이는데
노을이 지는 강서를 슬프게 바라보네"
*元伯:정선의 字
*王輞川:당나라 문인 왕유는 장안의 남쪽 종남산 망천(輞川)에서 시(詩)와 화(畵)를 벗삼아 살았기에 시불(詩佛)로 불렸다. 왕유는 혼자 시와 화를 결합하여 극치를 이루었지만 겸재와 사천은 둘이 합쳐져야 비로소 왕유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소 동파가 그의 작품을 '詩中有畵 畵中有詩'라고 극찬했다. 즉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뜻이다.

정선은 1740년, 65세의 나이에 양천현(현재 가양동 일대) 현령으로 발령받았는데, 정선과의 이별이 아쉬웠던 이병연은 "내 시와 자네 그림을 서로 바꿔봄에 그 사이 경중을 어이 값으로 논하여 따지겠는가?" 라는 시를 써서 보냈고, 그 화답으로 정선이 그림을 보냈는데 그게 바로 '시화환상간도'이다. 마치 교환 일기처럼 글과 그림을 바꿔보자는 약속인 '시화환상간도'.
그림 속엔 두 노인이 비단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다. 정면으로 보이는 이가 이병연이고 뒷모습이 보이는 이가 정선으로 추정된다. 이별이 못내 아쉬운 두 친구는 시와 그림을 교환할 것을 약속하고 훗날 그것을 모아 묶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경교명승첩'(서울 근교의 경치를 그린 그림첩)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서촌에서 가양동으로 간 것이기에 유난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를 생각하면 쉬운 이동 거리는 아니었다. 이 화첩은 현재 상하 두 권으로 나뉘어 있지만, 원래는 한 권이었다. 상권에는 정선의 자화상이 들어있는 그림(독서여가도)을 포함해 19점이 있으며 하권에는 14점이 담겨있다. 경교명승첩에는 양천현에서 바라본 남산의 일출, 압구정, 양화진, 난지도 일대 등 당시 한양의 모습이 상세히 그려져 있어 현재 모습과 그때 모습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퇴계 이황과 우암 송시열의 글씨에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4폭 등을 곁들인 16면짜리(표지 2면 포함) 서화첩 보물 제585호 '퇴우이선생진적(退尤二先生眞蹟)'에 담긴 4개의 그림중의 하나로 1000원 지폐의 뒷면에도 실려있는 계상정거는 안동에 있는 이황의 도산서원을 그린 것으로 자세히 보면 이황이 완락재에 앉아 있다.

정선의 외조부 박자진은 오래전 이황이 남긴 서문을 송시열에게 전해주고 발문을 받았는데, 이 과정을 정선이 4개의 그림에 담았고, 그중 하나가 계상정거다. 정선은 풍경을 그릴 때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 넣었는데 아무리 작게 그린 사람이라도 그가 선비라면 도포에 갓까지 쓴 완벽한 모습으로 표현했다.
이 외에도 고사인물화, 풀과 곤충을 그린 초충도 등 걸작들이 많이 있다
**인왕제색도는 해외 전시 일정으로 인해 5월 4일까지만 전시되니 참고 바랍니다.
겸재 金剛.關東-1金剛全圖
정선필 금강전도(鄭敾筆 金剛全圖)는 조선 후기 실경산수화풍을 연 겸재 정선(1676∼1759)이 영조 10년(1734)에 내금강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1984년 8월 6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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