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金剛.關東-1金剛全圖
<국보 정선필 금강전도 鄭敾筆 金剛全圖>

정선필 금강전도(鄭敾筆 金剛全圖)는 조선 후기 실경산수화풍을 연 겸재 정선(1676∼1759)이 영조 10년(1734)에 내금강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1984년 8월 6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내금강의 실경을 수묵담채로 그렸으며 크기는 가로 94.5cm, 세로 130.8cm이다. 전체적으로 원형구도를 이루고 있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모습이다. 눈덮인 봉우리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긋는 수직준법을 이용하여 거칠고 날카로운 모습으로 표현하였고, 이와 함께 위쪽에는 마의 올을 풀어서 길게 늘어놓은 듯이 그리는 기법인 피마준법으로 표현된 비로봉이 우뚝 솟아 있으며, 화면 중심으로는 만폭동 계곡이 위에서 아래로 가로지르고 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메마른 느낌의 봉우리들과는 대조적으로 왼편에는 무성한 숲을 이룬 부드러운 토산이 놓여 있는데, 이는 붓을 옆으로 눕혀 점을 찍는 방식인 미점준법으로 나타내었다. 화면의 윗부분에는 그림의 제목과 함께 작가의 호, 그림에 대한 감상 등이 적혀 있다.
당시의 산수화는 주로 중국 산수화를 보고 그린 것인데 반해 이 그림은 직접 우리나라의 실경을 보고 그린 것으로 정선이 그린 금강산그림 가운데에서도 가장 크고, 그의 진경산수화풍이 잘 드러난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금강산의 위용을 한눈에 잘 드러낸 작품 정양사와 만폭동, 금강대와 사자바위, 보덕굴, 묘길상, 혈망봉과 가장 높은 봉우리인 비로봉까지 새가 하늘위에서 내려다 보듯 금강산의 명소가 깨알같이 다 들어가 있어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화제시(畵題詩)에도 있듯 개골산 즉 겨울 금강 이다.
<그림 윗쪽의 畵題詩>

겸재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한 작품에만 직접 화제시(畵題詩)를 짖고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칠언율시(七言律詩)로 4개의 대구(對句)로 구성되었습니다.
<해설>
萬二千峯皆骨山 (만이천봉 개골산)
일만 이천 봉 겨울 금강 개골산
何人用意寫眞顔 (하인용의 사진안)
어느 누가 참모습 그리려고 하였는가
衆香浮動扶桑外 (중향부동 부상외)
뭇 향기는 동해 바다 밖으로 퍼지고
積氣雄譒世界間 (적기웅파 세계간)
그곳 쌓인 기운은 온누리에 웅장하게 펼쳐지네.
幾朶芙蓉□素□ (기타부용 □소□)
몇 송이 연꽃 봉오리는 해맑은 자태 드러내고?
半林松栢隱玄關 (반림송백 은현관)
소나무 잣나무 숲에 불당들이 가리어 있네.
從令脚踏須今遍 (종령각답 수금편)
직접 발로 곳곳을 답사해야만 두루 살펴 볼수 있겠으니
爭似枕邊看不慳 (쟁사침변 간불간)
이 작품을 베갯맡에 걸어두고 실컷 보는 것에 비할 수가 있으랴.
*□부분은 훼손된 글자
*미련(尾聯)은 직접 가 보기가 어려운 절경을 그림을 통하여 누워서 유람을 즐긴다는 와유(臥遊)를 읊음
<봉래전도 蓬萊全圖>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표 화가인 정선은 금강산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때 왕래 사신을 통하여 중국에 전해졌다가 돌아온 것으로 알려진 이 작품 역시 금강산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특히 약 3m에 달하는 긴 횡권(橫卷)으로 그렸다는 것이 독특하다. 전체 화면은 오른쪽에서부터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도입부로 금강산 가까이 창도역(驛) 주변 풍경이며,

이어 단발령이 있는 금강산 입구가 나타난다.



이를 지나면 장안사(長安寺)를 시작으로 그림의 중심부인 금강산의 주요 지역들이 펼쳐지는데, 이 세 번째 부분이 전체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 작품은 한때 중국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칠권 첫머리 '봉래선경(蓬萊仙境)'을 중국 문인이었던 장종상(張宗鮮,1882-1965)이 썼으며,

그림 뒤에 장종상과 곽소우(樓, 1893-1954)의 제발이 있다.
此盡用筆甚古,不類明中業畵人、筆劃中間一段皺法尤佳,絹亦舊物, 以釋名證之,當在明初,惜鄭氏之名遍尋諸書,未見著錄, 乃知古來書畵中埋沒之人,真不少也, 丁酉閏八月初二日,玉岑仁兄题、海寧張宗群時年七十六
이 그림은 붓의 운용이 매우 고풍스러워 명대(明代)의 그림을 전문으로 그리는 사람과는 같지 않다. 필획 가운데 일단(一段)의 준법은 더욱 아름답고, 비단 역시 오래된 물건이다. 화가의 이름을 알아 명대 초의 인물임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애석하게도 정씨(鄭氏)라는 이름을 모든 책에서 두루 찾아보았으나 실려 있는 기록을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로부터 서화가 가운데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묻혀버린 사람이 참으로 적지 않음을 알았다.
1957년 윤 8월 2일 옥잠 인형을 위해서 씀.
*해녕 장종상(張宗鮮) 이 때 나이 76세이다.
謙齋乃朝鮮人,蓬萊諸峯,亦見朝鮮地理小志, 此卷,乃玉岑兄偶於杭市骨董肆獲得者。 初不知作者何許人,乃一九六十年朝鮮畫報,始知識齋名歌。 為朝鮮現實主義傑出畫家,因特加珍視,囑為題記,是亦足協中朝友誼,添一佳話矣, 一九六二年 郭紹虞
겸재는 조선인이다. 봉래산의 여러 봉우리는 조선의 지리책에서 보았다. 이 그림 두루마리는 옥잠 형이 우연히 항주시(杭州市)의 골동가게에서 구한 것이다. 처음에는 작자가 누구인줄 몰랐으나 1960년 조선화보를 보고 비로소 겸재의 이름이 선(敵)인줄 알았다. 조선 현실주의의 걸출한 화가이기 때문에 진귀한 볼거리를 특히 더한다. 옥잠형이 글을 부탁하므로 적어두니 이 또한 중국과 조선의 우의(友誼)가 되며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더하는 것이다. 1962년 곽소우(郭紹虞)
<풍악내산총람 楓岳內山摠覽>

제명이 풍악이니 가을 금강산 이다.
원화 가 대작이라 그림 곳곳 명소 마다 적혀있는 명칭을 확인하며 이를 찾아 보는 것 또한 즐거움 이었다.
*출처: 용인호암미술관 겸재정선전(2025.04.02~06.29) 및 대구간송미술관간 '겸재정선' 책자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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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의 추억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사업 덕분으로
금강산을 다녀온지도 어언 20년쯤 강원 고성에서 육로로 들어가 삼일포에 정박된 배(설봉호?)에서 숙박 빡빡한 일정으로 내외금강을 돌며 감탄 했던 암봉 절벽 폭포 계류 옥담 등 경관들 그리고 외금강 만물상 꼭대기 근처 철제잔도 입구까지 올랐으나 심장이 두근거려 더이상 오르지 못하고 아내와 둘만 남아 동행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아득한 위아래 경관에 심장이 쫄깃쫄깃 했던 일 등등....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관광객 한분의 북한병사 접촉 사건으로 이 사업도 페쇄 되었고
등등.... 이 자료들을 올리며 오버렙 되는 추억도 즐겨봅니다.
-선생의 금강산 전체를 아우르는 전도 외에도 수차레에 걸친 금강산 및 동해 관동 지역의 답사 사생을 통해 많은 그림을 남기신바 각 명소의 화첩등 그림들을 계제 아래에 링크 합니다.
겸재 金剛.關東-2辛卯年楓嶽圖帖
=(전)해악전신첩 (前)海嶽傳神帖>보물 정선 필 풍악도첩 鄭敾 筆 楓嶽圖帖, 신묘년풍악도첩 鄭敾筆辛卯年楓嶽圖帖정선은 금강산 전체를 아우르는 금강전도뿐 아니라 각각의 명소도 따로 떼어
lazy-river.tistory.com
*한양(漢陽=서울) 및 한강(漢江) 지역
작품들은 별도 계제 준비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