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겸재 金剛.關東-2辛卯年楓嶽圖帖

시뜨락 시정(詩庭) 2025. 5. 7. 02:49

<신묘년풍악도첩 辛卯年楓嶽圖帖>

신묘년풍악도첩 정선 조선, 1711년 비단에 수묵담채 36.0×37.6 cm外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보물
정선 필 풍악도첩 鄭敾 筆 楓嶽圖帖,
신묘년풍악도첩 鄭敾筆辛卯年楓嶽圖帖

정선은 금강산 전체를 아우르는 금강전도뿐 아니라 각각의 명소도 따로 떼어 세부적인 작품도 그렸는데, 이것들을 모아 '신묘년풍악도첩'을 만들었다. 신묘년 가을에 만든 이 화첩에는 총 13점이 들어있다.

그림들과 내력과 화첩 이름을 담은 발문이 1첩으로 돼 있다. 발문에는 1711년에 겸재와 같은 동네(서울 인왕산 자락)에 살았던 백석공(白石公) 신태동(1659∼1729)이 두 번째 금강산 여행을 할 때 정선과 함께 하여 금강산도를 사생케 하였다는 내용이 전한다.

<신묘년풍악도첩>은 <금강내산총도(金剛內山總圖)>, <피금정(披標亭)>, <단발령망금강산(斯髮嶺望金剛山)>, <장안사(長安寺)), <보덕굴(普德宿)》, (불정대(佛頂豪)), (백천교(百川橋)〉, 〈해산정(海山亭)), (삼일호(三日湖)>, <문암관일출(門巖觀日出)〉, 〈옹천(遷)), <총석정(石亭)), (시중대(侍中臺)> 등 13폭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선은 이 화첩에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명소를 비롯하여 내금강과 해금강의 명소를 망라하였다. <신묘년풍악도첩>은 조선 후기에 유행한 금강산 산행의 경로를 잘 보여 준다. 또한 정선은 섬세한 필치와 채색을 활용하여 표현하는 동시에 생략과 과장을 통해 각 화폭의 중심이 되는 소재를 부각시켰다.

이 화첩에 그려진 금강산은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의 주요 명승을 담고 있어 금강산의 형세와 특징에 따라 대각선과 원형구도를 적절하게 사용하고, 미점과 피마준, 수직준 등을 다양하게 구사하였다. 특히 금강내산에 묘사된 경물은 중심이 되는 대상을 크게 부각시키고, 빽빽한 구도를 사용하였다. 산봉우리마다 명칭을 적어놓고 길을 뚜렷이 표시한 것은 조선시대 지도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정선의 초기작은 사경산수와 회화식 지도의 전통에 근거하여 마침내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양식을 개척하였음을 말해준다.
이는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훌륭한 기준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주목된다. 초기작이므로 후기의 원숙한 화풍에 비해 일면 미숙한 부분도 엿보이긴 하지만, <풍악도첩>에 수록된 그림들은 한결같이 화가 초창기의 활력과 열의로 가득 차 있다. 금강산을 처음 대하는 화가의 정서적 반응, 그리고 우리나라 산천을 앞에 두고 이에 가장 걸맞은 표현방식을 모색해내려는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형성된 과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금강내산총도 金剛內山總圖>

금강내산총도 金剛內山總圖

마치 현대의 여행 안내 지도와 같이 내금강산의 모든 명소가 한 쪽에 압축되어 있다. 이를 위해서 정선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부감시를 활용하였다. 또한 그는 주요 지명을 모두 기입하여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그림은 정선이 생애 동안 줄곧 그려 온 금강산 전도류 그림의 가장 초기의 모습을 보인다. 수풀이 우거진 토산은 옆으로 길게 늘어진 미점과 열은 푸른 색조의 선염으로 표현되어 있다. 반면 뾰족하게 솟아오른 암산은 수직으로 내린 간결한 필선과 함께 모든 산머리에 흰색의 물감으로 덧칠되어 있어 토산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고 있다. 아울러 정선은 그림의 최하단에 위치한 장안사의 비흥교(飛虹橋)를 크게 그려 금강산의 도입부를 강조하였다. 그림의 최상단에는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이 중량감 있는 모습으로 홀로 우뚝 솟아올라 있다.

<피금정 披襟亭>

피금정 披襟亭

금성(金城) 남대천(南大川) 변에 위치한 정자이다. '옷깃을 풀어 젖히는 정자'란 뜻을 담고 있는 피금정은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향하는 유람객들이 반드시 거쳐가는 장소였다. 정선은 그림 하단에 대각선으로 흐르는 남대천과 그 언덕 위에 피금정을 배치하였다. 또한 정자의 양 옆에는 강변을 따라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길게 늘어서 있다. 산허리가 안개로 가려진 원경의 산은 금성의 원경의 산을 묘사하였다. 경파산(慶坡山)이다. 정선은 실재하는 정자와 지역을 그렸으나 그 표현에 있어서는 화보에 기재된 남종화법을 참고하여 나무와 원경의 산을 묘사하였다.

<단발령망금강산 斷髮嶺望金剛山>

단발령망금강산 斷髮嶺望金剛山

단발령은 강원도 창도와 내금강 사이에 위치한 고개이다. 이 지명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하나는 신라의 마의태자 (麻衣太子)가 이곳에서 삭발하였다는 설이며 다른 하나는 이곳에서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머리를 깎고 속세를 떠나고 싶어진다는 설이다. 정선은 화면의 전경에는 토산으로 된 단발령을, 원경에는 암산으로 된 금강산을 배치하였으며, 그 사이를 구름으로 과감하게 생략하였다. 단발령 정상에 도착한 그림 속 여행객들은 잠시 남여(藍興)에서 내려 구름 위로 솟아오른 금강산을 가리키며 그 장관을 감상하고 있다.

<장안사 長安寺>

장안사 長安寺

금강산의 4대 사찰 중 하나인 장안사는 신라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때 진표율사(眞表律師) 혹은 556년 신라에 귀화한 승려인 혜량(惠亮)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고찰(古刹)이다. 그림 하단부에 크게 그려진 반원형의 다리는 비홍교(飛虹橋)이다. 여행객은 단발령을 넘어 반드시 이 다리를 건너야 비로소 금강산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정선은 금강산의 시작을 알리는 이 다리를 다소 과장된 크기로 표현하였다. 비홍교 뒤에 위치한 장안사는 금강산에 유람객들이 빈번히 유숙(留宿)하는 장소로서 그 모습이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보덕굴 普德窟>

보덕굴 普德窟

만폭동(萬瀑洞)의 물이 모여 형성된 벽하담(碧霞潭)의 오른쪽에 높이 솟아있는 기암절벽 중간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동굴이 바로 보덕굴이다. 이 그림에는 보덕굴에 조성된 작은 암자가 묘사되어 있다. 보덕굴의 반대편에는 층층이 쌓여 형성된 바위 절벽인 금강대(金剛臺)와 그 위로 삼각형 모양의 토산인 대향로봉(大香爐峰)과 소향로봉(小香爐峰)이 보인다. 또한 대향로봉과 보덕굴 뒤로 바늘같이 뾰족한 암산이 수평으로 줄지어 서 있다. 정선의 이 그림은 그가 처음으로 금강산 화첩을 제작하며 자신이 관찰한 경치를 최대한 아우르기 위한 시도의 결과물로 생각된다.

<불정대 佛頂臺>

불정대 佛頂臺

불정대(佛頂臺)는 내금강에서 외금강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위치한 거대한 돌 기둥으로 외금강의 명소인 12폭포를 조망하는 데 적합한 장소이다. 정선은 불정대를 강조하기 위해 화면의 중앙에 배치하였으며 '부처님 정수리'라는 명칭의 뜻을 살리고자 한 듯 불정대의 정상에 작은 둥근 바위들을 얹어 마치 부처님의 나발(蝶髮)처럼 보이게 하였다. 또한 이 정상에 그려진 큰 소나무들은 주변의 다른 소나무와 달리 채색과 섬세한 붓질이 더해져 매우 세심하게 묘사되어 있다. 불정대에서 벼랑 아래로 내려다보면 외원통암(外圓通庵)과 소나무 숲이, 위로 올려다보면 첨탑 모양의 암산들 사이로 굽이치는 12폭포가 보인다. 정선은 암자와 원경의 폭포 및 암산의 크기를 조절하는 동시에 산허리가 점차 안개 속으로 사라지듯 희미하게 표현하여 불정대와의 거리감을 드러내었다.

<백천교 百川橋>

백천교 百川橋

조선시대 금강산 유람은 장안사의 비홍교에서 시작되어 외원통암 아래의 백천교(百川橋)를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정선의 이 그림에는 다리라고 할 만한 것이 그려져 있지 않다. 정선은 화면 중앙에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흐르고 있는 강을 배치하여 화면을 양분하였다. 양분된 화면 중 왼쪽에는 금강산을 유람한 네 명의 갓을 쓴 인물들이 금강산을 떠나기 전에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며 마지막으로 주변의 경치를 눈에 담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한 이들이 타고 다녔던 남여(藍興)와 이를 메고 다녔던 승려들이 보인다. 그 맞은 편 강 건너에는 금강산 여행을 마친 이들을 모시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위한 네 마리의 말이 묘사되어 있다. <백천교)는 조선 후기 유행한 금강산 유람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보여 주는 중요한 그림이다.

<해산정 海山亭>

해산정 海山亭

조선시대의 금강산 여행객들은 대부분 외금강의 유점사(楡岾寺)를 통과하여 해금강 지역, 즉 고성(高城)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여행은 관동 지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마무리되었다. 해산정은 바다, 산, 강을 한자리에서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정자라는 의미로 금강산을 나와 처음으로 맞이하는 해금강의 명소이다. 이 그림에는 해산정의 명칭에 걸맞게 세 종류의 모든 경치가 아우러져 있다. 화면의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정자를 중심으로 멀리 원경에는 병풍처럼 서 있는 금강산의 뾰족한 앞산들이 보인다. 화면의 왼쪽에는 강의 경치인 적벽(赤壁)과 남강(南江, 지금의 남대천) 및 바다의 경치인 동해 바다와 북두칠성과 같은 배열로 서 있는 칠성봉(七星峯)이 그려져 있다. 정선은 해산정 주변의 무수히 많은 경관들을 한 폭에 담아내기 위해 안개를 적극 활용하여 광활한 일대를 생략 및 압축하였다.

<삼일호 三日湖>

삼일호 三日湖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인 삼일호(三日湖)는 관동팔경 중 하나로 그 명칭은 신라시대 때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석행(南石行), 안상(安詳)이라는 네 명의 화랑이 이 절경에 반해 3일 동안 머물렀다는 일화에서 유래되었다. 호수 한 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에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가 바로 위의 네 화랑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사선정(四仙亭)이다. 정선은 화면의 가장자리에 이 호수를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산봉우리들을 묘사하여 삼일호의 전체 모습이 한 눈에 보이도록 하였다. 산봉우리 너머에는 동해바다의 수평선이 열은 채색의 선염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이 화폭의 주제인 사선정은 이전 불정대와 동일하게 채색과 섬세한 붓질이 더해져 강조되어 있다. 사선정 아래에는 이 곳에 가기 위해 배를 향해 이동하는 2명의 말을 탄 인물과 마부가 묘사되어 있다.

<문암관일출 門巖觀日出>

문암관일출 門巖觀日出

삼일호의 서북쪽에 있는 문암(門巖)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문암은 삼일호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 그림의 오른쪽 하단에는 <삼일호)와 동일한 모습의 사선정이 그려져 있다. 정선은 <삼일호>의 화면 왼쪽 상단에 그려진 문암을 클로즈업하여 이곳에서 동해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감상하는 모습을 담아내었다. 문암의 거대한 바위 꼭대기 위에는 4명의 사람들이 해가 뜨는 방향으로 앉아 있다. 이들의 시선 방향에는 수평선 위로 반쯤 올라온 붉은 해와 그로 인해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이 열은 선염으로 표현되어 있다. <문암관일출>은 <신묘년풍악도첩>의 그림들 가운데 유일하게 특정 시점에서 행해진 행위가 주제로 그려진 그림이다.

<옹천 甕遷>

옹천 甕遷

동천(遷)은 북한의 통천읍 바닷가 부근에 위치한 항아리 모양의 원형 절벽이다. 옹천의 허리에는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폭이 좁은 잔도(棧道)가 있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천길 낭떠러지 아래에는 거센 파도에 의해 날카롭게 깍여나간 작은 바위들이 자리하고 있다. 세찬 파도가 이곳에 부딪히며 하얀 포말(泡沫)을 일으키고 있다. 정선은 옹천의 거대한 암석 절벽을 긁는 듯한 마른 붓질을 중첩하여 거친 질감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거대한 암석 덩어리의 중량감은 잔도를 걷고 있는 인물과 대비되어 더욱 두드러진다. 옹천의 아랫부분을 치며 일어난 파도에는 흰색을 덧칠하여 억센 기세를 강조하였다.

<총석정 叢石亭>

총석정 叢石亭

총석정(叢石亭)은 동천군 바닷가에 있는 누정(樓亭)이다. 이 지역은 용암이 오랜 세월 풍화되면서 형성된 여러 모양으로 각이 진 주상절리(柱狀節理) 로 유명하였다. 파도와 비바람에 의해 깎여나간 주상절리는 마치 바위가 층층이 쌓인 듯 보이기 때문에로 '총석(叢石)'이라고 불렸다. 아울러 총석정은 육지의 일부가 바다를 향해 좁고 길게 뻗어 있는 매우 특이한 지형 끝에 위치하고 있다. 정선은 이곳의 지형적 특징을 잘 담아내기 위해 지면이 화면 왼쪽 하단에서 중앙으로 뻗어 나가게 표현하였으며 그 끝에 총석정을 묘사하였다.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4개의 돌기둥은 총석정 바로 오른쪽, 포물선 방향으로 융기한 땅 안쪽에 있다. 정선은 파도의 너울을 점차 희미하게 처리하여 드넓은 바다를 표현하였다.

<시중대 侍中臺>

시중대 侍中臺

관동 지역에서 제일 북쪽에 위치한 흡곡(翕谷)에 있는 시중호(侍中湖) 일대를 그린 그림이다. 이곳은 호수에 일곱 개의 섬이 더 있기 때문에 칠보대(七寶臺)라고 불렸었다. 그러나 이 명칭은 세조 때 강원도 순찰사로 와 있던 한명회(韓明澮, 1415-1487)가 이곳을 유람하던 중 우의정(右議政)으로 임명하는 교지(敎旨)를 받게 되면서 시중대(侍中臺)로 바뀌게 되었다.
정선은 이 장소의 특징인 여러 개의 섬을 그려 넣었다. <시중대>에는 화면 하단의 칠보도(七寶島)를 시작으로 호수 끝자락에 있는 화학대(化鵝臺)와 저 멀리 동해에 마름모 모양으로 뾰족하게 솟아있는 작은 섬들이 보인다.

<발문 跋文>

발문 跋文

도첩의 내력과 화첩 이름을 담은 발문에는 1711년에 겸재와 같은 동네(서울 인왕산 자락)에 살았던 백석공(白石公)신태동(1659∼1729)이 두 번째 금강산 여행을 할 때 정선과 함께 하여 금강산도를 사생케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겸재 金剛.關東-3 關東八景等

단발령(斷髮嶺)과 철이헌(鐵伊峴)을 넘어 내금강(內金剛)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장안사가 있다. 이 그림의 장안사 앞에는 내금강의 물이 모여 내리는 금강천(金剛川), 그 위에 건립된 비홍교(飛虹

lazy-river.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