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金剛.關東-3 關東八景等
<장안사 長安寺>

단발령(斷髮嶺)과 철이헌(鐵伊峴)을 넘어 내금강(內金剛)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장안사가 있다. 이 그림의 장안사 앞에는 내금강의 물이 모여 내리는 금강천(金剛川), 그 위에 건립된 비홍교(飛虹橋)와 이를 내려다보는 산영루(山映樓)가 하단에 그려져 있다. 장안사의 모습은 비교적 단출하게 그려져 있고, 대신 오른쪽에 암봉(岩峯)이 수림으로 울창한 절의 앞산, 뒷산과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다. 금강천 시냇물에 두고두고 씻겨, 닳고 닳아버린 바위들은 뭉게구름 같은 권운준법(卷雲皺法)을 써서 암봉의 준법(法)과는 또 다른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바위, 나무와 숲 등의 표현에서 추상성이 강하여 정선이 76세인 1751년경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백천동 百川洞>

백천동은 금강산에 있는 계곡으로 서쪽의 만폭동(萬瀑洞) 물과 동쪽의 영원동(靈源洞) 물이 합수(合水)되는 곳이다.
화면 왼쪽을 가득 채운 초삭(峭削)한 암산(岩山)이 지장봉(地藏峯), 중앙에 세로로 솟은 바위가 명경대(明鏡臺)이다. 그 오른쪽에 암문(暗門)이 있는 석축(石築)이 고성(古城)의 잔해인데, 신라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들어와 쌓았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예리한 필치로 그려진 봉우리들은 골기(骨氣) 늠름한 전형적인 정선의 금강산도이며, 창윤(蒼潤)한 미가수법(米家樹法)과 복잡한 점염법(點業法)으로 살벌한 금기(金氣)를 중화시키고 있다. 대담한 구도와 장쾌한 암봉의 표현, 소나무 숲 사이로 바람 흐르는 듯 성기지만 생동감 있는 수목 표현 등은 정선 노년기 작품의 특징이다. 정선이 76세인 1751년경에 제작된 <장안사)와 함께 그려진 작품이다.
<만폭동 萬瀑洞>

만폭동은 금강산 내금강의 비로봉(毘盧峯), 중향성(香香城, 영랑봉 동남쪽을 병풍처럼 둘러싼 바위군) 일대의 물이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암산 계곡을 따라 골골마다 나뉘어 흘러오다가 한 곳으로 모이는 금강산의 주요 절경 중 하나이다. 정선은 만폭동의 상징인 넓은 너럭바위에 두 선비와 금강산 유람을 안내하는 승려 한 명을 중심으로 대소(大小) 향로봉(香爐峯)과 좌선암봉 (坐禪岩峯)을 좌우로 배치하며, 그 너머로 중향성의 골봉(骨峰)들을 삼엄하게 나열시켰다. 대향로봉 뒤 사자암(獅子岩)을 마치 구름처럼, 좌선말봉 뒤 좌선암(坐禪岩)은 간결한 필치로 앉아서 참선에 든 사람처럼 그려내었다. 이러한 대상을 추상화시키는 화풍은 정선 노년기의 특징이다. 이 그림은 <장안사>,<백천동> 등 금강산과 동해의 명승을 그린 <관동팔경도>의 한 작품이다.
<혈망봉 穴望峰>

혈망봉(穴望峰)은 내금강과 외금강의 분기점에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이다. 이 명칭은 봉우리의 한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어 그 구멍을 통과하여 경치를 바라볼 수 있는 봉우리 자체의 특징에서 유래되었다. 정선은 혈망봉을 정양사 바로 앞에 위치한 천일대(天一臺)에서 바라보는 시점으로 표현하였다. 정양사와 함께 천일대는 광활하게 펼쳐진 수많은 금강산의 암석 봉우리를 감상하기 적합한 장소였다. 그림 속 천일대는 산허리가 토산의 모습으로 홀로 화면 중앙에 솟구쳐 올라와 있으며 그 정상에는 한 그루의 전나무와 두 그루의 소나무가 하늘 높이 자라나 있다. 혈망봉은 그림의 우측에 솟아 올라 있는 봉우리 중 하나로 추정된다. 그림 속의 철망봉은 그 특징인 구멍이 묘사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혈망봉을 정면이 아닌 측면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정양사 正陽寺>

정양사(正陽寺)는 내금강에 빼어난 경치에 자리한 사찰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 재위 918-936)이 담무갈보살(愛無竭菩薩)을 친견하고 예배를 드린 뒤 창건하였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정양사의 누각인 헐성루(歇惺樓)는 금강산의 일만이천봉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소로 특히 유명하였다. 정선은 이러한 지리적 특성을 이 화폭에 잘 담아내었다. 내금강의 토산 지역중턱에 있는 정양사가 그림의 왼쪽 하단에, 금강산의 암산이 정양사의 대각선 방향으로 오른쪽 상단에 배치되어 있어 마치 정양사에서 금강산의 봉우리들을 바라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정양사 바로 옆에는 실제로 정양사와 가장 가까이 위치한 명승지 중 하나인 금강대(金剛臺)가 그려져 있다. 정선은 안개를 활용하여 정양사와 금강대가 있는 토산 지역과 이곳에서 보이는 광활하게 펼쳐진 암산 지역을 명확하게 분리하였다.
<정양사 正陽寺>

고려 태조가 금강산에 올라 이 산에 상주하는 담무갈보살을 친견하고 정양사를 창건했다고 하는데, 금강산의 정맥(正脈)에 건립한 사찰이라 정양사라 이름했다. 절의 뒷 봉우리를 담무갈보살이 나타나 빛을 내던 대라 하여 방광대(放光臺)라 하고, 앞산 마루를 태조가 신료들을 거느리고 와서 쉬다가 담무갈보살에게 절하던 고개라 하여 배재(拜帖, 절 고개) 또는 진헐대(眞歇臺, 임금이 쉬던 대)라 한다. 정양사의 누각인 혈성루를 걸어 나와 천일대에 이르면, 저녁 안개 걷히며 석양이 맞비치니 중향성(葉香城) 일대가 은성옥벽(銀城玉壁, 은으로 만든 성과 옥으로 만든 벽)처럼 휘황하게 빛난다고 한다. 그래서 겸재 정선은 정양사를 그릴 때 금강산의 여러 봉우리를 병풍처럼 휘감아 놓는 화면 구성을 자주 사용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정양사와 뒷산인 방광대, 천일대만 그리고 다른 금강산의 모습은 모두 화면에 넣지 않았다. 미가산수법(米家山水法)을 자기화하여 더 대담하게 묵묘(墨妙)를 활용하면서, 방광대를 비롯한 정양사 주변을 쪽빛으로 훈염(暈染)하여 환상적인 신비경(神秘景)을 이루어 놓고, 그 안에 정양사 건물을 배치함으로써 진경을 극단적으로 이상화시키고 있다. 이 그림은 <금강대)와 한 쌍으로, 정선이 80대에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금강대 金剛臺>

금강대는 표훈사(表訓寺) 북쪽 만폭동에 있는 높은 돌기둥 형태의 석대(石臺)로, 주변에 벽하담(碧霞潭), 보덕굴, 대·소 향로봉(香爐峯) 등 아름다운 경물이 가득한 곳이다. 그러나 겸재는 이 작품에서 금강대 돌기둥 하나만 우뚝하게 그려놓아 극도로 추상화된 진경산수화법을 보여준다. 정선이 만년에 주로 사용한 특유의 대담한 필법으로 금강대를 층지고 모나게 그려놓고, 그 주변을 마치 푸른 안개가 감싸듯이 담청(淡靑)의 쪽빛으로 훈염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금강대와 석벽 사이는 깊은 푸른색으로 메워져 금강대가 아득히 하늘을 뚫고 솟아 있는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어찌 보면 금강대 자체가 마치 푸른 하늘에 떠 있는 신기루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푸른 물결 속에 잠겨 있는 해인세계(海印世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대상의 본질을 완벽하게 터득하여 그 정수만을 추출해 내고 그것을 종합하여 일필휘지(一筆揮之)하는 것이 동양화가 추구하는 구극(究極)의 경지임을 그림을 통해 실감할 수 있다. 금강대 뒤에 그린 대 소향로봉의 윤곽선은 선필(筆)인 듯 무심하기까지 하다.
' 금강대', '겸재'라는 글씨와 도장은 80대 노대가의 초탈함을 보여준다. 거의 같은 기법으로 그려진 <정양사>와 함께 한 쌍을 이룬다.
<비로봉 毘盧峯>

금강산의 무수히 많은 봉우리 가운데 그 최고봉은 바로 비로봉이다. 해발 1,638미터에 이르는 이 봉우리는 금강산의 다른 암산들과 달리 다소 크고 뭉툭하여 거대한 암석 덩어리의 느낌이 두드러진다. 칼날과 같이 얇고 뾰족한 암산들 위로 단 하나의 거대한 둥그스름한 비로봉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 있다. 이 두 대상의 극적인 대비는 이 그림을 보는 이에게 비로봉의 장대한 위용에 압도되게 한다. 더욱이 정선은 서로 다른 두 형세를 오직 먹을 묻힌 붓에 의지하여 각각의 모양에 적합한 필법으로 그은 선을 계속해서 쌓아가며 완성하였다.
겸재 金剛.關東-4海嶽傳神帖
을 다시 꾸미고자 72세(1747년)에 금강산을 다시 여행하여 36세에 그렸던 그림들을 72세 노대가의 솜씨로 다시 그려낸 것이 (후)이다. 이 화첩에는 21면의 그림과 78세로 생존해 있던 이병연이 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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