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金剛.關東-4海嶽傳神帖
<보물 해악전신첩 海嶽傳神帖>

<해악전신첩)은 '바다와 산의 정신을 담은 화첩' 즉 금강산과 동해 바다의 초상화(肖像盡, 傳神,寫真)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711년은 정선이 36세 되던 해였는데, 이병연이 금강산 초입의 금화현감으로 재임 중 스승인 김창흡을 모시고 금강산을 처음 여행했다. 이때 김창흡과 이병연은 진경시(詩)로 금강산을 사생하고, 정선은 진경산수화로 금강산을 사생하여 이를 합쳐 (전)해악전신첩 신묘년풍악도첩을 이룩해 정선의 이름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후 정선은 평생 화도 수련을 쉬지 않고 결국 진경산수화풍을 대성해 냈으며, 자신의 출세작인 <해악전신첩>을 다시 꾸미고자 72세(1747년)에 금강산을 다시 여행하여 36세에 그렸던 그림들을 72세 노대가의 솜씨로 다시 그려낸 것이 (후)<해악전신첩>이다. 이 화첩에는 21면의 그림과 78세로 생존해 있던 이병연이 쓴 시, 당대 명필 홍봉조(洪鳳作,1680-1760)가 쓴 김창협의 시가 합장(合裝)되어 있다. <신묘년풍악도첩>은
패기 넘치는 36세 무명 화가의 그림답게 열정과 희망이 넘쳐나 필법(筆法)은 날카롭고 묵법(法)은 숙연하도록 엄정하며, 화면 구성은 대경(對境)에 충실하려 도설적(圖說的)이라고 할 만큼 정밀하다. 그에 반해 <해악전신첩>은 72세의 노대가의 그림답게 달관(達觀), 파겁(破怯)과 확신으로 가득 차필법은 부드럽게 세련되고, 묵법은 거침없이 분망하며, 화면 구성은 대경의 요체 파악에 중점을 두어 함축과 생략이 자재롭게 구사되고 있다.
<금강내산 金剛內山>

금화(化)에서 금성(金城)을 거쳐 내금강으로 들어가려면 단발령을 넘어야 하는데, 그곳에 올라서면 비로봉을 주봉(主峰)으로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마치 한 떨기 하얀 연꽃처럼 눈앞에 떠오른다고 한다. 그 감흥을 정선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부감(俯瞰)으로 포착하여 내금강 전경을 한 화폭 안에 담아낸 것이다. 이는 정선이 노년기에 터득한 우주 자연의 섭리를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에 투영시켜 진경산수화로 반사해 낸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음중양(陰中陽)으로 음양조화(陰陽調和)의 주역(周易)」 원리를 표방하고자 미가운산식(米家雲山式)의 토산이 상악세(霜鍔勢)의 백색 화강암봉을 포근하게 감쌌다. 부드럽고 질펀한 청묵(青墨)과 날카롭고 삼엄한 골선(骨線)이 신묘한 대조를 이루며,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백구암자(八百九庵子)가 가슴에 가득 차 있지 않고서는
그려낼 수 없는 그림이다.
<화적연 禾積淵>

'화적'은 우리말 '볏가리'의 한자역(漢字譯)이다. 화적연은 평지 아래로 까마득히 떨어져 흐르는 한탄강 물 가운데, 마치 볏단(볏가리)을 쌓아놓은 것처럼 생긴 거대한 백색 바위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경기 포천시 영북면 자일리에 있다. 정선은 가로로 길게 놓인 바위를 마치 죽순이 솟아난 것처럼 바꾸어 '화적연'이라는 주제를 부각시켰다. 바위 주위로 한탄강 물이 긴 소용돌이를 지으면서 감겨 도는 모습을 그렸는데 높게 솟은 바위와 음양대비를 만든 것이다. 더불어 수직 절벽과 짙은 송림으로 다시 한번 음양의 조화를 멋들어지게 강조하여 화적연의 분위기를 더욱 깊고 그윽하게 그려 놓았다.
<삼부연 三釜淵>

삼부연은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에 있으며, 용화산(龍華山) 일대의 물이 한탄강으로 흘러가다 천길 벼랑을 만나 떨어져 만들어진 폭포이다. 폭포 상류에 세개의 가마솥(三釜)과 같은 여울이 있어서 삼부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이 삼부연은 정선의 스승인 김창흡이 은거하던 곳으로, 삼연은 물론 삼부연을 상징하는 별호이다. 그런 이유로 김창흡의 여러 제자들이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렸는데, 정선은 만년기의 호방장쾌한 필법을 거침없이 구사해 득의작(得意作)을 그려내었다. 암벽을 장쾌하게 쓸어내리는 필법이나, 울창한 소나무 숲의 흥건한 먹칠법이 보이는 강렬한 대비와 조화가 그 특징이다. 너럭바위에 서서 폭포를 바라보는 네 명의 선비와 두 동자는 정선의 일행이었던 모양이다.
<화강백전 花江柏田>

'화강'은 철원군 금화읍의 다른 이름이니 <화강백전>은 '금화의 잣나무 밭'이란 의미이며, 잣나무가 가득 심어진 백수봉(柏樹峰)주변의 그림이다. 병자호란 때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柳琳, 1581-1643)이 이곳에서 청군(淸軍)을 크게 무찔렀으나, 뒤따라 내려온 평안감사 홍명구(洪命粉, 1596-1637)는 이곳에서 근왕병(勤王兵) 2천 명과 함께 청군에게 패하여 장렬한 최후 마치었다. 그래서 화강백전은 호란(胡亂)의 치욕을 절치부심 하던 조선사람이 기억해야 할 성지가 되었고, 문인들은 시를 짓고 정선은 <화강백전>을 그려 순국한 2천 명의 충혼의백(忠魂義魄)을 기린 것이다. 밀림처럼 빽빽하게 자란 잣나무 숲에서 옛 전쟁터의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그림 왼쪽 하단에 홍명구의 충혼을 기리는 충렬사(忠烈祠) 건물을 그려 이 그림의 성격을 드러냈다.
<피금정 披襟亭>

철원군 금화에서 금강산으로 가자면 금성을 거쳐 단발령을 넘어야 하며, 금성을 거치면 성 아래 남대천변 큰 길에서 피금정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다. 피금정은 정선이 4세 때인 1679년에 당시 현감으로 있던 안정소(安廷繡)가 창건했으며, 1635년에 심어진 가로수와 어울려 금강산 초입의 정취를 북돋우던 곳이다. 정선은 이 그림에서 피금정과 그 주변의 가로수를 모두 미가수법 (米家樹法)의 남방화법(南方書法)으로 대담하게 일원화시키는 노숙성을 보인다. 구도도 과감한 생략이 이루어지고 위아래에 하늘과 물을 상징하는 공활(李闊)한 여백을 남김으로써 무궁한 시정(詩情)을 유발해내려 하였다.
<정양사 正陽寺>

정양사는 금강산의 정맥(正脈)에 자리를 잡고 있는 까닭에 '정양'이란 이름을 얻었으며, 지계(地界)가 높고 탁 트여 금강산의 내외 첫 봉우리들을 하나하나 다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정양사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바라보이는 시각으로 그리는데, 정선은 이 작품을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인 금강대(金剛臺)와 소나무 가득한 천일대(天一臺)가 정양사를 살짝 가리는 구도로 그렸다. 창울(蒼鬱)한 송림으로 덮인 토산 속 파묻힌 정양사의 모습을 음(陰)으로 보고, 높이 솟아난 정양사의 여러 전각과 금강대의 모진 암봉(岩峯)을 양(陽)으로 보면 음양조화가 이루어지는 작품이다.
<불정대 佛頂臺>

정철(鄭道, 1536-1593)은 관동별곡」에서 외나무 썩은 다리 건너서 불정대에 오르면 십이폭(十二幅)이 은하수처럼 걸려 있으니. 이 장관은 이백(李白, 701-762)을 불러 놓고 여산과 금강산을 비교하면 금강산이 못하지 않다고 할 것이라 했다. 정선은 「관동별곡의 진경 묘사력에 감복했던 듯 그 내용에 영락없이 부합하도록 <불정대>를 그렸다. 이 그림에는 박달봉(朴達峯)과 불정대 사이에 통나무를 걸어 놓은 듯한 나무 다리가 걸려 있고, 그 뒤로 두 굽이 십이폭 폭포수가 정말 베폭을 펼쳐 내린 듯 까마득히 내리 떨어지게 그려져 있다. 대부벽준(大斧劈皴)과 절대준(折帶皴)을 가미한 대담한 필묵법으로 호방하게 묘사한 불정대와 박달봉은 임리(淋漓)한 미가수법(米家樹法)과 어우러져 웅혼한 기상이 표출되고 있다. 외나무다리가 놓인 천길 절벽의 틈새는 짙은 하늘빛으로 메꾸어 한정 없이 깊은 허공임을 강조하고, 십이폭의 흰빛 물줄기와 절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사선정 四仙亭>

사선정은 강원도 고성군의 삼일포(三日浦) 또는 삼일호(三日湖)라고도 부르는 호수 중앙의 큰 바위섬에 건립된 정자이다.
이 섬은 신라 때 국선(國仙, 花郞) 4명이 이곳에 왔다가 그 경치에 홀려 3일 동안 돌아가는 것도 잊고 놀았다는 사선도(四仙島)이다. 정선은 《신묘년풍악점》(1711년), <관동명승첩) (1738년), <해악전신첩> (1747년), <관동팔경도) (1751년경) 등에서 이 삼일호를 그렸으며, 72세에 그린 <해악전신첩>의 <사선정>은 정선의 화면 구성의 대담성, 필법의 완성도, 대상의 추상화 등이 가속화되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사선도의 바위나 그 위쪽 문암봉(門岩峯) 등의 바위를 조개껍질처럼 표현하거나, 사선정 아래 우뚝 솟은 바위는 합장하고 서 있는 사람처럼 그리는 등의 필법이 눈에 띈다.
<총석정 叢石亭>

이 작품은 정선이 72세 때 그린 <해악전신첩>의 <총석정>이다. <신묘년풍악도첩> (36세)과 <관동명승첩>(63세)의 <총석정>은 주변 경물을 빠짐없이 그리거나 총석봉(叢石峯)을 중앙에 배치하는 등 완숙하지 못한 표현들이 있었다. 이에 반해 이 작품은 다소 밋밋한 총석봉을 크게 휘어 오른쪽에 일부만 그리고, 그 옆에 사선봉(四仙峯) 육각 기둥 네 개만을 나란히 두는 절묘한 화면 배치를 통해 총석정의 인상을 재정의해 놓았다. 또한 육각 기둥은 양(陽)으로, 반원 형태로 휘어진 총석봉의 절벽은 음(陰)으로, 양을 음이 감싸는 듯 음양의 이치로 풀어내기도 했다.
<용공동구 龍貢洞口>

(융공동구)는 강원도 통천군 추지령(楸池嶺)에 있는 용공사(龍貢寺) 혹은 발삽사(勃颯寺)라는 사찰의 입구를 그린 작품이다.
융공사는 신라와 고려 때 큰 사세(寺勢)를 유지했던 사찰이지만 1710년에 전소되어 정선이 방문했을 때는 폐허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절 모습보다는 동구(洞口)의 수려한 암벽과 유수(達)한 동학(洞壑, 산골짜기)의 경관을 화폭에 담았던 것 같다. 김창흡, 이병연, 조유수 등의 시를 보면 용공사의 동구는 만폭동처럼 장쾌한 물 구경이 가능하고 주변의 숲이 짙푸르렀던 듯하다.
정선은 유독 이 그림에서 멀고 가까운 산, 솔숲, 바위 등을 청묵(青墨)으로 짙게 우려내어 용공사 동구의 울창함을 강조하고 있다.
<사인암 舍人岩>

<사인암>은 어느 폭포를 그린 것인데, 그림 뒤에 붙여진 김창흡의 시를 보면 "곡운(谷雲, 화천군), 삼부연(三釜淵, 철원군)" 곁에 이 폭포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이 인근에 사인암으로 알려진 폭포가 없지만 철원 매월대폭포, 가평 적목용소, 가평 명지폭포 등 빼어난 폭포가 있어서 이를 정선이 사생한 듯하다. 이 작품에 그려진 사인암은 절벽으로 이뤄진 암봉이지만 삼엄한 수직 절벽은 아닌 듯 피마준을 주로 써서 산형을 표시하고 미가송법(米家松法)과 미점(米點)만으로 임상(林狀)을 드러냈다.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폭포수가 웅장하게 내리 떨어져 낭화(浪華)를 일으키며, 굽이쳐 흐르는 아래 시냇물의 수파문(水波紋)이 우렁차다.
<칠성암 七星巖>

칠성암은 강원도 고성군의 남강 하구, 동해 바닷속에 있는 일곱 개의 바위섬이다. 백색 화강암이 수수만년 동안 거친 파도와 바람에 씻겨 마치 하얗게 세어 버린 노인의 형상처럼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인데, 그 배열이 북두칠성과 같다 하여 칠성암 또는 칠성봉이라고 한다. 정선은 이 칠성암을 각별히 좋아한 듯 고성의 해산정(海山亭)을 그릴 때 칠성암을 꼭 화면에 넣어 그렸는데, <해악전신첩>에서는 칠성암만 단독으로 그린 것이 이 작품이다. 정선은 칠성암의 바위를 다양한 농담의 권운준(巻雲皴)으로 그렸으며, 사람이 서기도 하고 혹은 쭈그려 앉기도 하며 또는 의자에 앉기도 하는 등 각양각색 인물의 자태로 표현해 놓았다.
겸재 金剛.關東-5關東名勝帖
겸재 정선은 58세인 1733년 6월, 지금의 경상도 포항 지역인 청하현감(清河縣監)에 부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면서도 화필(畫筆)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경상도 지역의 명승을 사생(寫生)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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