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화상간도를 보면 큰 소나무 아래로 신선 같은 두 노인이 마주 앉아 있다. 66세의 겸재와 71세의 사천이다.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은 시와 그림을 바꿔 본다’는 것
겸재 정선의 그림과 사천 이병연의 시가
오가며 만들어진 시화첩이 바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다. 말그대로 서울과 서울 근교 한강 일대 이름다운 경치를 화첩으로 꾸몄다. 남한강 상류에서 시작해서 배를 타고 유람하면서 양천 10경을 비롯한 한강 주변의 명승들을 겸제가 그리고 이 그림들에 사천의 시를 담았다.

소나무 아래서 그림을 보는 두노인이 있고 오른쪽 위 재발(題跋)은 ‘자네의 그림과 나의 시를 바꾸자’는 사천의 편지글이 겸재의 필치로 적혀있
畵題는 ‘我詩君畵換相看 輕重何言論價間’. (내 시와 그대의 그림을 서로 바꿔보면 무슨 말로 경중에 값을 매기겠는가) 라는 내용으로
겸재가 양천으로 떠나기 전 친구 사천 이병연과 한 ‘나의 시와 그대의 그림을 바꾸어 보도록 하세(詩畵換相看之約)’ 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병연이 겸재가 부임한 이듬해 봄 겸재에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 이다

與
鄭謙齋 有詩去畵來之約 期爲往復之始
我詩君畵換相看 輕重何言論價間
詩出肝腸畵揮手 不知雖易更雖難
辛酉仲春 槎弟
“나와 정겸재 사이에는 시와 그림을 주고받자는 약속을 했는데 약속대로 왕복을 시작한다.
내 시와 그대의 그림을 서로 바꿔보면 무슨 말로 경중에 값을 매기겠는가.
시는 간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을 휘두르니 어느 것이 쉽고 어려운지 모르겠구려.
신유 봄에 사제”

畵題 옆 頭印 ‘천금물전(千金勿傳)’ 이라는 도장은 “천금을 준다 해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는 다짐 도장이다.
*천금물전(千金勿傳), 즉 천금을 준
다고 해도 남에게 전하지 말라는
겸재의 당부는 지켜졌을까?
답:이 화첩은 그의 둘째 아들 정 만수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런데 정만수의 조카이자 겸재의 손 자로 그림 재주를 물려받은 정황이 숙부를 졸라 화첩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주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 은 만포 심환지(였다. 그는 겸재 그 린의 광적인 애호가이자 영의정까 지 지낸 인물이다. 심환지는 이 화 첩을 2첩으로 나누고, 자신의 발문 을 함께 붙여 두었다. 결국 겸재의 당부는 지켜지지 못했다.
한국 전통에서 벗의 중요성은 예술로도 표현되었습니다. 조선 중기의 유명한 문인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의 우정은 오늘날까지 예술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두 사람은 다섯 살 차이였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깊은 우정을 나누었고, 함께한 시간이 짧지 않음을 시와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겸재는 사천과 약속하여 ‘시가 가면 그림이 온다’는 뜻의 ‘시거화래지약(詩去畫來之約)’을 체결하고, 서로의 우정을 시화로 남기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로 완성된 <경교명승첩>은 조선시대 예술의 걸작이자, 두 사람이 교류한 깊은 우정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경교명승첩>은 단순한 예술 작품이 아닙니다. 주제, 화풍, 사천과의 교류로 구성된 작품 속에는 두 사람이 나눈 감정과 기억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벗이란 존재가 주는 의미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그 우정을 예술로 승화시킬 만큼 깊은 정서를 주고받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시화상간도를 보면 큰 소나무 아래로 신선 같은 두 노인이 마주 앉아 있다. 66세의 겸재와 71세의 사천이다.
시화상간과 관련해서는 다른 시(詩)도 전해진다.
贈別鄭元伯
爾我合爲王輞川
畫飛詩墜兩翩翩
歸驢已遠猶堪望
怊悵江西落照天
정원백(元伯)과 이별하며
나와 그대가 합해야 왕망천이 되는데
그림 날고 시 떨어지니 둘이 다 퍼덕이네
돌아가는 나귀 멀어져도 아직은 보이는데
노을이 지는 강서를 슬프게 바라보네
*元伯:정선의 字
*王輞川:당나라 문인 왕유는 장안의 남쪽 종남산 망천(輞川)에서 시(詩)와 화(畵)를 벗삼아 살았기에 시불(詩佛)로 불렸다. 왕유는 혼자 시와 화를 결합하여 극치를 이루었지만 겸재와 사천은 둘이 합쳐져야 비로소 왕유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정선(화가)
조선 후기의 화가 . 생애 1676년(숙종 2) 1월 3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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