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뿐-휴정 休靜
<가야산에서 노닐며遊伽倻>
지는 꽃 내음 골짝에 가득
숲 저편에선 우짖는 새들.
절집은 대체 어디에 있나
봄 산반 너머 구름뿐일세.
落花香滿洞 啼鳥隔林聞
낙화향만동 제조격림문
僧院在何處 春山半是雲
승원재하처 춘산반시운
항만동香滿洞: 향기가 골짝에 가득하다.
격립문隔林聞: 숲을 사이에 두고 들린다.
승원僧院: 승려가 거처하는 집. 절 반시半是: 절반이나.
가야산 해인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여름이 드는 초입, 늦게 핀 꽃들이 부산스레 진다. 지저귀는 새소리, 지는 꽃향기에 귀와 코가 어지럽더니 눈부신 신록에 눈마저 헌사롭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해봐도 절집은 나오질 않는다. 지팡이 멈춰 서서 골짝을 보니 흰 구름만 자옥하다. 늦은 봄 가야산 골짝 에서 나는 길을 잃고 만다.
휴정 休靜, 1520-1604
조선시대, 8도 16종 선교도총섭을 역임하고, 『선가귀감』, 『청허당집』 등을 저술한 승려. 승군장.
1520년(중종 15) 평안도 안주(安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완산(完山)이고,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이름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이었다. 자는 현응(玄應)이며, 법호는 청허(淸虛)이다. 별호는 백화도인(白華道人), 조계퇴은(曹溪退隱), 서산대사(西山大師) 등 다수이다. 아버지는 향관(鄕官)을 지낸 최세창(崔世昌), 어머니는 한남 김씨(漢南 金氏)이다. 고려 말 태고보우(太古普愚)가 원에서 전수해 온 임제종(臨濟宗)의 정통 법맥을 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12세에 고을 수령인 이사증(李思曾)의 도움으로 서울로 옮겨가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지리산에 유람 갔을때 불교를 처음 접하였다. 헛된 이름을 멀리하고 깨달음을 추구하라는 숭인(崇仁)의 권유를 받아 출가하였고, 부용영관(芙蓉靈觀, 1485∼1571)의 제자가 되었다. 수학 과정에서 『능엄경(楞嚴經)』 · 『원각경(圓覺經)』 · 『법화경(法華經)』, 그리고 『전등록(傳燈錄)』 · 『선문염송(禪門拈頌)』 · 『화엄경(華嚴經)』 등을 공부하였는데, 이는 승과의 시험 교재이거나 승려 교육 과정에 들어간 경전 및 선서였다. 1550년(명종 5)에 문정대비에 의해 선교양종이 재건되자 1552년 승과에 합격하였고, 선종과 교종의 판사를 겸직하였다. 1566년에 선교양종이 다시 폐지되었는데, 그 전에 그만두고 금강산에 가서 수행과 교육에 매진하였다. 그 뒤에는 묘향산 보현사(普賢寺)로 옮겨 주석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8도 16종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으로 임명되었다. 앞서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 때 휴정이 거짓 고발을 당해 옥에 갇히자, 선조가 그의 글을 읽고 무혐의로 풀어주며 대나무 그림을 그려준 인연이 있었다. 휴정은 평안도 의주로 선조를 찾아가 “나라 안의 승려 가운데 늙고 병들어 나설 수 없는 자들은 각자 있는 곳에서 수행하고 신령의 도움을 기원하게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소집하여 종군하게 하려 합니다. 신 등이 비록 군역을 지는 부류는 아니지만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임금의 은혜와 훈육을 입었는데 어찌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목숨을 바쳐서 충심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며 평안도 법흥사(法興寺)에서 전국의 의승군 5,000명을 일으켰다.
이때 황해도의 의엄(義嚴), 강원도의 사명유정(四溟惟政), 전라도의 뇌묵처영(雷默處英) 등 각지의 승장들이 승군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의승군은 평양성과 행주산성 등 주요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이순신(李舜臣)의 수군에도 참여하였다. 또 산성의 축조와 방비, 군량 조달 등 후방 지원 사업을 담당하였다. 1593년 선조가 서울로 돌아올 때도 승군이 호위하였는데, 휴정은 그 직후 도총섭을 그만두고 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 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고 읊은 후 세수 85세, 법랍 67세로 입적하였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탑이 세워졌다.

휴정의 문하에서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는데, 대표적 제자로는 청허계의 4대 문파를 이룬 정관일선(靜觀一禪, 1533∼1608), 사명유정(泗溟惟政, 1544∼1610), 소요태능(逍遙太能, 1562∼1649), 편양언기(鞭羊彦機, 1581∼1644)를 들 수 있다. 이들 외에도 문집을 남긴 영허해일(暎虛海日, 1541~1609), 제월경헌(霽月敬軒, 1544∼1633), 청매인오(靑梅印悟, 1548∼1623), 기암법견(奇巖法堅, 1552∼1634), 중관해안(中觀海眼, 1567∼?), 영월청학(詠月淸學, 1570∼1654), 운곡충휘(雲谷沖徽, ?~1613)가 이름난 문도였다. 휴정의 법맥을 이은 청허계는 조선 후기 최대의 계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