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의 漢陽.漢江-15 銅雀津. 龍汀返照. 義禁府圖
<동작진 銅雀津>

현재의 동작대교가 놓여 있는 동작나루를 강북 쪽에서 보고 그린 그림이다. 화면의 왼쪽 하단에는 단 한 번의 필획(筆劃)으로 땅과 강이 나누어져 있다. 이 땅은 강을 중심으로 북쪽에 해당하며 그 위에 말을 탄 선비가 시종과 함께 배를 기다리고 있다. 강 건너 동작나루에는 무수히 많은 배가 정박해 있으며 나루터와 연결된 길 위로 당나귀를 타고 있는 선비는 지나온 경치가 아쉬운 듯 뒤돌아보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동작봉(銅雀峰)의 산비탈에는 수많은 기와집과 버드나무들이 가득 차 있다. 정선은 그림의 왼쪽 하단에 배치된 육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푸른 색조를 풍부하게 사용하였다. 특히 원경에 중첩되어 있는 여러 산봉우리들을 미묘한 색조 조절과 점차 희미하게 표현되는 바림 기법만으로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용정반조 龍汀返照>

용정(龍江)은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일대를 부르는 옛 이름이며, 반조(返照)는 일몰을 뜻한다. 정선은 줄곧 시간의 경과에 따른 해의 움직임, 즉 뜨거나 저물고 있는 해에 관심을 두었다. 이 그림의 경우 용정에서 해가 저무는 모습이 담겨져 있다. 그림의 오른쪽 하단에는 바위 위에서 저 멀리 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는 모습을 관조하고 있는 두 사람이 묘사되어 있다. 인물 주변의 나무와 강 건너 위치한 마을의 나무에 찍혀 있는 흰색과 분홍색의 점들은 두 인물이 봄날에 용정의 바위산에 올라갔음을 알려 준다. 아울러 정선은 진경산수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실제 존재하는 아름다운 경관뿐만 아니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해의 모습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 관심이 드러난 가장 초기의 사례는 1711년에 제작된 <신묘년풍악도첩>의 <문암관일출>이다. 정선 이전의 조선 회화에서 해는 일반적으로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과 같이 특정한 목적 아래에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정선은 해를 상징물로 보기보다 자연 경관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로 바라보았다. 이는 정선이 18세기부터 활발하게 조선에 유입된 서양 화법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이 그림은 서양 화법이 정선에게 미친 영향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의금부도 義禁府圖>


의금부는 1729년에 정선이 도사로 제수되어 활동하였던 관청이다. 위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 "의금부, 겸재 정선이 그렸다(義禁府鄭謙齋敾所畵)"라고 쓰여진 글은 이 그림의 화가가 정선임을 알려 준다. <의금부도>는 경물을 살리고 죽이는 정선의 특기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정선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인 부감시와 주로 궁궐 그림에 활용되는 대각선의 투시도법을 활용하여 의금부의 전체 모습과 그 구조를 충실하게 담아 내었다. 또한 원경에 배치된 산은 정선 특유의 미점(米點)과 간결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산허리와 의금부에서 멀리 떨어진 가옥들에 사용된 안개 표현은 <의금부도>에 깊은 공간감을 형성한다.
아래 그림 좌목(坐目)인 「금오요원록(金吾僚員錄)」는 정선을 포함한 총 22명이 기재되어 있다.
겸재 의 漢陽.漢江-16 漣江壬戌帖
경기도 관찰사였던 홍경보(洪景輔, 1692-1744)는 1742년 임술년에 이 화첩의 제작을 기획하였다. 임술년은 과거 북송대 지식인인 소식의 적벽부(赤壁賦)」가 집필된 해(1082)이다. 홍경보는 동일한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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