少年遊-周邦彦
少年遊(소년유)-周邦彦(주방언)
少年遊(소년유)
並刀如水(병도여수)
예리한 병주 칼은 물처럼 서늘하고
吳艶勝雪(오염승설)
오땅 미녀의 살색은 눈보다 더 희다.
纖指破新橙(섬지파신등)
섬섬옥수는 갓 딴 귤을 까고
錦幄初溫(면악초온)
비단 수를 놓은 장막은 따뜻하고
獸香不斷(수향부단)
향로의 연기는 쉴 새 없이 퍼져간다.
相對坐調笙(상대좌조생)
마주 앉아 생황 소리 들으며
低聲問(저성문)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는다.
向誰行宿(향수행숙)?
오늘 저녁은 어디 가서 묵으세요?
城上已三更(성상이삼경)
성안은 이미 삼경인데
馬滑霜濃(마활상농)
말안장은 미끄럽고 서리도 심하니
不如休去(불여휴거)
차라리 쉬어가면 어떨까요?
直是少人行(직시소인행)
진실로 젊은 사람이 노는 모습이로다.

*주방언(周邦彦)
송사는 유영이 대담하게 새로운 제재들을 개발하고 뒤이어 소식이 과감한 작풍으로 호방한 노래를 지은 후, 백가쟁명의 국면을 맞았다. 수많은 사인(詞人)들이 연이어 저마다의 독특한 재능으로 서로 다른 풍격을 창조하여, 사는 그야 말로 영광스러운 시대를 엮어 나갔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작가 중에 오직 주방언 만이 천고의 사인들로부터 으뜸으로 갈채를 받았으니, 그의 작품이야말로, 사(詞)의 표준이라고 여겨졌다. 주방언의 출현은 북송 사단에 있어서 실로 획기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주방언이 사단의 정통으로 추대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주요 원인을 탁월한 재능과 함께 음률에 정통하여, 매우 정교하면서도 격조 높은 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송사 번성의 주요인은 음악의 발전과 밀접하다. 음악이 발전된 이후 고정적인 형식의 당시(唐詩)는 더 이상 곡을 붙여 노래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각 구절의 장단이 일정하지 않은 사의 형식이 특별히 필요하였다. 이러한 신흥 문학 형식의 가장 큰 장점은 세밀히 쪼개져 가지런하지 않은 구절 속에 눌렀다 펴고 또 굽이치는 음절을 표현하고, 또 꺾이고 되돌리는 가운데 섬세하고 완곡한 정감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사란 모름지기 세밀하면서도 아름답고 함축적이어야 하며, 특히 음률에 잘 맞아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주방언의 사는 바로 이러한 요구에 꼭 부합되었다. 격률과 형식을 대단히 중시하되 사실 묘사에 이미지를 표출하고, 또한 성률을 엄격히 시키며 글자를 아름답게 다듬어 사색하고 묘사하기에 적합하게 했다. 그가 자연스릅게 사단의 정통으로 추대된 것을 그런 이유에서였다.
주방언은 송인종(宋仁宗) 가우(嘉祐) 원년 (1056년)에 태어나 휘종(徽宗) 선화(宣和) 3년(1121년)에 생을 마쳤다. 자는 미성(美成)이고 호는 청진거사(淸眞居士)로 절강성(浙江省) 전당(錢塘)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경치가 빼어난 항주(杭州)에서 자랐으니 그것엔 물결이 넘실대는 아름다운 서호(西湖)와 천군만마가 내리는 듯한 전당의 물결이 있었다. 아름다운 호수와 산의 빼어난 경관은 그의 문학적 천재성을 잉태시키고 풍류와 낭만적인 성격을 키워냈다.
주방언은 청년 시절 행동거지가 그다지 단정치 않았기에 고향 사람들은 그를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워낙 총명한데다 많은 책을 읽어, 문장은 대단히 뛰어났다.
24세가 되자 변경(汴京)의 태학(太學)에서 4-5년 간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변경은 북송의 수도로써 많은 인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문물이 번성하여, 그는 그곳에서 견문을 넓히고 문장 실력을 쌓아갔다. 훗날 주방언이 써서 바친『변도부(汴都賦)』를 읽어본 신종 황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칭찬하여 그를 태학생의 신분에서 일약 교수로 발탁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다시 외지의 관리로 파견되었다.
외지에서 맡은 관직은 주부(州府), 혹은 지현(知縣) 등과 같은 직급으로 계급은 별로 높지 않았지만 오히려 독자적으로 일을 처리하며 유유자적하게 지낼 수 있었다. 본시 자유분방한 낭만적 성격의 소유자로 늘 기녀들의 춤과 노래에 빠져 있던 까닭에 내용면에서 볼 때 그의 사는 늘 예쁘고 구성진 정감을 담고 있어서 자연히 주루의 기녀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생애는 임금으로 명으로 사를 지었던 유영(柳永)의 처지와 매우 비슷했다.
훗날 휘종이 즉위하여 고대 악곡을 정리하기 위해 대성악부(大晟樂府)를 설치하고, 주방언이 음악에 조예가 깊다는 사실을 알고 그 일을 맡겼다. 이 자리는 주방언에게는 정말 안성맞춤으로, 그는 심혈을 기울여 고악(古樂)을 정리하였다. 그런데 이 직책은 한 연에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시 주방언은 변경으로 들어와 경조윤(京兆尹)에 속하여 감세관(監稅官)의 직을 맡고 있었다. 변경(汴京)은 매우 번화한 곳으로 곳곳엔 유곽이 즐비했다. 자유분방한 주방언은 업무 외의 여가 시간에는 예외 없이 여색과 가무를 즐기며 나날을 보냈다. 당대의 유명한 기생 이사사(李師師)와 서로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그 무렵 많은 고관뿐만 아니라 심지어 당시 갖 즉위했던 젊은 황제 휘종(徽宗) 역시 간소한 상인 복장으로 주루를 드나들면서 민간의 기녀들과 어울려 놀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휘종도 이사사를 좋아하게 되었으니 주방언과 당대의 천자는 서로 연적이 된 것이다. 이사사는 두 사람 사이에서 고심했다. 어느 날 저녁 주방언이 이사사를 찾아 술을 마시며 정담을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휘종이 왔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임금과 신하의 신분이 있었기에 주방언은 매우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다행히 이사사가 황망 중에 묘안을 생각해내어, 잠시 침대 밑으로 숨으라고 했다. 그날 저녁 휘종은 귤 한 바구니를 가지고 와서 “강남에서 막 바쳐온 진상품인데, 사사에게 친히 하사하노라!” 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사는 껍질을 벗겨 휘종에게 먹여주며 한동안 웃고 즐겼다. 침대 밑에 숨어 있던 주방언은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괴로워할 뿐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휘종과 이사사가 그 날 밤에 나누었던 웃음과 정경을 소년유(少年遊)라는 사로 그려냈다.
후에 이 시를 보게 된 휘종은 매우 기분이 나빠 승상 채경(蔡京)에게 주방언이 세금 징수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해직시키도록 하고, 한동안 변경을 떠나 있도록 명했다. 주방언은 항변도 못하고 그저 못내 아쉬운 마음을 안고 사사에게 이별을 고하려갔다. 사사는 본디 의리있고 정이 많은 여인으로 줄곧 ‘여자계포(女子季布)’라는 명칭이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주방언을 매우 동정하여 그를 위해 송별연을 베풀었다. 주방언은 이별의 희한을 가득 품고 『난릉왕(蘭陵王)』이라는 시를 한 수 지어 이사사에게 주었다. 그날 밤 휘종이 이사사를 찾았을 때 그녀는 휘종 앞에서 난릉왕을 노래했다.
*계포(季布) : 항우와 유방이 천하의 패권을 놓고 다툴 때 계포는 항우에 속한 장군이었다. 후에 항우가 垓下의 싸움에서 패하자 계포는 도망가 협객 주가(硃家)의 집에 숨었다가 주가의 도움으로 등공(縢公) 하후영(夏後嬰)의 천거를 받아 한고조 유방의 용서를 받았다. 한고조는 계포를 한나라의 관리로 등용하고 이어 문제 때 이르러 대신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생전에 한 번 한 약속을 반드시 지켰음으로 그의 약속은 천금보다도 더 무겁다는 계포일락(季布一諾)이라는 사자성어의 주인공이 되었다.
난릉왕(蘭陵王)
其一
柳陰直(유음직)
버드나무 그늘 곧게 드리웠는데
煙裏絲絲弄碧(연리사사농벽)
안개 속에 가지마다 푸른빛 돈다.
隋堤上(수제상)
수나라 뚝방에서
曾見幾番(증견기번)
몇 번이나 보았을까,
拂水飄綿送行色(불수표면송행색)
수면을 스치며 떠도는 버들가지는 이별하는 마음을 표하듯
登臨望故國(등림망고국)
뚝방에 올라 고향 땅 바라보는
誰識京華倦客(수식경화권객)
서울의 지친 나그네, 그 누가 알아볼까?
長停路(장정로)
장정의 길로
年去歲來연거세래)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오며
應折柔條過千尺 (응절유조과천척)
부드러운 버들가지 천 자도 넘게 꺾였으리.
其二
閑尋舊蹤跡(한심구종적)
쓸슬히 옛 자취 더듬다가
又酒趁哀弦(우주진애현)
또 슬픈 가락 따라서 술잔을 기울인다.
燈照離席(등조리석)
등불은 이별의 술자리 비추는데
梨花楡火催寒食(이화유화최한식)
배꽃 피고 느릅나무 불 댕기는 한식이 가까워졌구나.
愁一箭風快(추일전풍쾌)
슬프다, 화살처럼 빠른 바람에
半篙派暖(반고파난)
상앗대, 따스한 물살에 반쯤 잠겨
回頭迢遞便數驛(회두초체편수역)
돌아보니 지나온 역참 몇 개이런가 ?
望人在天北(망인재천북)
그리운 님 북쪽 하늘 끝에 있다.
其三
悽惻(처측)
슬픔에
恨堆積(한퇴적)
한이 쌓인다.
漸別浦縈廻(감별포영회)
이별의 포구 굽이굽이 점점 멀어져 가니
津堠岑寂(진후잠적)
나루터의 돈대는 적막하다.
斜陽冉冉春無極(사양염염춘무극)
뉘엿뉘엿 석양은 지는데 봄빛은 대지에 가득하다.
念月榭攜手(염월사휴수)
생각난다, 달빛 가득한 누대에서 잡았던 손,
露橋聞笛(노교문적)
이슬 내리는 다리에서 들었던 피리소리.
沈思前事(침사전사)
묵묵히 지난일 생각하니
似夢裏(사몽리)
꿈만 같아,
淚暗滴(누암적)
남몰래 눈물 떨군다.
휘종은 이 사를 듣고 대단한 천재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작가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사사는 주방언이 자신과 송별할 때 지은 시라고 고하며 아울러 주방언을 좋은 말로 변호했다. 휘종은 비로소 자신의 처벌이 지나쳤음을 깨닫고 사면령을 내려 다시 변경으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휘종은 주방언을 더욱 친애하게 되었고, 마침내 앞서 말한 대성악정(大晟樂正)이라는 음악을 관정하는 부서의 장관에 임명했다.
*주방언(周邦彥 : 1056-1121)
북송 항주(杭州) 전당(錢塘) 사람. 사(詞)의 대가. 자는 미성(美成)이고, 호는 청진거사(淸眞居士)다.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났지만, 방종한 성격 때문에 고향 사람들에게 소외당했다. 원풍(元豊) 연간에 수도로 올라가 「변도부(汴都賦)」를 바쳐 신종(神宗)으로부터 인정받고 태학생(太學生)에서 태학정(太學正)으로 승진했다. 5년 동안 자리를 옮기지 않고 사장(辭章)에 더욱 진력했다. 외직으로 나가 여주교수(廬州敎授)와 율수현령(溧水縣令)을 지냈다. 돌아와 국자감주부(國子監主簿)가 되었다.
철종(哲宗)이 불러 대면하고는 비서성정자(秘書省正字)에 임명했고, 교서량(校書郞)과 하중지부(河中知府)를 역임했다. 휘종(徽宗) 때 비서감(秘書監)과 휘유각대제(徽猷閣待制), 대성악부제거(大晟樂府提擧)에 올랐다. 나중에 순창부(順昌府)와 처주(處州)의 지사(知事)를 거쳤다. 음률(音律)에 정통하여 고전음악의 정비와 신곡(新曲) 개발을 통하여 완약성(婉約性)과 전아성을 겸비한 팔면영롱(八面玲瓏)한 작품을 완성시켰다. 격률(格率)이 근엄(謹嚴)했다. 저서에 『편옥사(片玉詞)』와 『청진집(淸眞集)』 등이 있다.
(이야기중국문학사 : 지세화의 일빛출판사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