相思怨-李冶
<상사원·相思怨-이야.李冶>
人道海水深, 인도해수심
不抵相思半. 부저상사반
海水尙有涯, 해저상유애
相思渺無畔. 상사묘사반
携琴上高樓, 휴금상고루
樓虛月華滿. 루허월화만
彈著相思曲, 탄저상사곡
弦腸一時斷. 현장일시단
<사랑이 한이 되다>
사람들은 바닷물이 깊다하지만
내 그리움의 절반도 되지 않아요.
바닷물은 그래도 끝이 있지만
내 그리움은 아득하여 끝이 없답니다.
거문고 들고 주루에 올라보니
누각은 비어있고 달빛만 휘황하네
그리움의 노래를 홀로 타노라니
거문고 줄과 애간장이 한순간에 끊어집니다.
*‘그리움이 빚은 원망(상사원·相思怨)’
그리움이 쌓이고 쌓여 끝내 원망으로 남았다는 애소(哀訴). 그리움의 깊이를 바다와 견준 단순한 비유이지만 단순하기에 더 절절한 느낌이다. 애타는 마음을 달래려 거문고 가락에 그리움을 실어 보는 시인. 텅 빈 누각, 쌓인 원망을 씻으려 시인은 하릴없이 같은 노래를 쉼 없이 타고 있었는지 모른다. 급기야 뚝 끊어지는 현줄. 순간 시인은 이참에 단장(斷腸)의 그리움마저 절연(截然)히 사그라지길 기원했을까. 아니면 그리움이 빚은 원망이 더한층 깊어 가는 불안한 예감을 가졌을까.
(동아일보 '이준신의 한시 한 수'에서)

*이야(李冶·약 730∼784)唐
시인의 자는 계란季蘭이며, 호주湖州 오흥吳興 출신이며, 설도薛濤, 어현기魚玄機와 더불어 당조唐朝 삼대三大 여류시인女流詩人으로 꼽힌다.
타고난 재자가인才子佳人으로서 어려서부터 거문고를 잘 탔고 시적 재능이 뛰어나 5,6세 즈음 아버지가 정원에서 그녀를 안고 있는데
“경시미가각經時未架却, 심서란종횡心緖亂縱橫” 즉, ‘때가 지나도 채워지지 않는 바구니,
이 내 맘 어지럽기만 하다’라며 ‘영장미詠薔薇(장미를 읊다)’라는 시를 지어 읊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부녀자답지 못한 행동”이라 여기며 어린 딸을 출가出家시키려고 했다. 당시 사회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길을 도사道士가 되는 길뿐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11살 되던 해에 섬중剡中(저장성浙江省 일대)에 있는 도교道敎 사원寺院인 도관道觀에 들어가 여도사女道士가 되어 육우陸羽(733∼804), 유장경劉長卿(725~789) 등과 교류가 깊었다.
육우陸羽는 이야李冶가 병들어 누웠을 때, 진정 그녀를 이해하며 찾아왔던 친구였고, 유장경劉長卿은 그녀를 “여류 시인 중의 호걸(여중시호女中詩豪)이다”라고 추켜세웠다. 그녀의 뛰어난 문재文才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서 드디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덕택에 그녀는 궁중宮中 악기樂妓가 되어 덕종德宗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훗날 반란군의 장수에게 시를 지어 보낸 것이 화근이 되어 처형당하는 비운悲運을 맞았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