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詠懷古跡五首之五-杜甫

시뜨락 시정(詩庭) 2024. 12. 11. 20:15

영회고적오수 중 제5수 (詠懷古跡五首之五-두보(杜甫)
<고적에서 회포를 읊다 )>

[其五]제갈량(諸葛亮)
諸葛大名垂宇宙(제갈대명수우주) :
제갈량의 큰 이름 우주에 드리우고
宗臣遺像肅淸高(종신유상숙청고) :
큰 신하의 초상화 청고하고 엄숙하다.
三分割據紆籌策(삼분할거우주책) :
삼분할거의 큰 포부 펴지 못했으나
萬古雲霄一羽毛(만고운소일우모) :
하늘에 낀 구름, 오랜 세월 깃털 같구나.
伯仲之間見伊呂(백중지간견이려) :
백중의 사이로 여궁이 보이고
指揮若定失蕭曹(지휘야정실소조) :
지휘와 안정에는 소조도 못 따랐다.
運移漢祚終難復(운이한조종난복) :
시운이 떠나 한나라의 복조를 끝내 회복하지 못하니
志決身殲軍務勞(지결신섬군무노) :
군무에 시달려 큰 뜻 결판나고 몸마저 죽었구나.

[通釋] 제갈량(諸葛亮)의 빼어난 이름은 온 천지 사이에 흘러 전해져서, 청고(淸高)하게 남겨진 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히 존모(尊慕)의 마음을 품게 한다. 유비(劉備)를 도와 천하를 삼분하고 촉한(蜀漢)을 세울 당시 그는 온갖 뛰어난 계책을 내었고, 그의 훌륭한 인품과 덕성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치 난새와 봉황이 높은 하늘을 나는 듯 우뚝하여 후인들이 도저히 미칠 수 없다. 그가 세운 공업은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에 견주어도 백중지간(伯仲之間)이라 할 만하며, 그의 탁월하고 침착한 지휘와 책략은 소하(蕭何)와 조참(曹參)도 빛을 잃게 만들 정도이다. 시운이 옮겨가 촉한(蜀漢)의 국운을 끝내 회복할 수 없었지만, 그는 군무를 처리하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마음을 굳게 정하여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다.

역주1> 宗臣遺像肅淸高(종신유상숙청고) : ‘宗臣(종신)’은 세인에게 존경받는 대신(大臣)을 말한다. ‘宗(종)’은 尊仰(존앙)의 의미이다. ‘肅淸高(숙청고)’는 제갈량의 청고(淸高)한 인품과 덕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숙연하게 존경의 마음을 갖도록 한다는 뜻이다. ‘肅(숙)’은 존경하고 우러르는 모양이며, ‘淸高(청고)’는 인품과 덕성이 순결하고 고상(高尙)한 것이다.
역주2> 三分割據紆籌策(삼분할거우주책) : ‘三分割據(삼분할거)’는 제갈량이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蜀漢)을 세운 뒤 위(魏), 촉(蜀), 오(吳) 세 나라가 정립(鼎立)한 형국을 가리킨다. ‘紆(우)’는 繁雜(번잡)의 뜻이며, ‘籌策(주책)’은 계책을 세운다는 말이다. 혹은 ‘紆(우)’를 ‘屈(굴)’의 뜻으로 보아, 삼국이 정립한 후 영웅호걸들의 온갖 계책이 쏟아져 나왔는데 제갈량이 그 계책들을 다 굴복시킨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역주3> 萬古雲霄一羽毛(만고운소일우모) : 제갈량의 초매(超邁)함은 마치 鸞鳳(난황)이 높이 날아올라 푸른 하늘을 홀로 나는 듯하여, 후인들이 닿을 수 없는 경지에 있다는 뜻이다. ‘羽毛(우모)’는 난새와 봉황을 가리킨다. 혹자는 ‘一’을 ‘獨’으로 풀어 강조의 뜻으로 보기도 한다.
역주4> 伯仲之間見伊呂(백중지간견이여) : ‘伯仲之間(백중지간)’은 본래 형제 사이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서로 상하를 따질 수 없다는 뜻이다. ‘伊(이)’는 상(商)나라 현신(賢臣)인 이윤(伊尹)인데, 성탕(成湯:탕왕)을 보좌하였다. ‘呂(여)’는 주(周)나라의 현신 강태공 여상(呂尙)인데 文王·武王(문왕,무왕)을 보좌하였다. 두 사람 모두 현주(賢主)를 도와 나라를 세운 명신들이다.
역주5> 指揮若定失蕭曹(지휘약정실소조) : ‘指揮若定(지휘약정)’은 제갈량이 정치와 군사에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어, 정무를 처리하고 군사를 쓰는 데 남들이 헤아릴 수 없는 계책을 이미 마음으로 다 정했다는 뜻이다. ‘失蕭曹(실소조)’는 蕭何(소하)와 曹參(조참)으로 하여금 黯然(암연)히 失色(실색)하게 한다는 뜻이다. 소하와 조참은 한(漢) 고조(高祖)의 모신(謀臣)이다.
역주6> 漢祚(한조) : 한(漢) 황실의 제위(帝位)를 말한다.
역주7> 志決身殲軍務勞(지결신섬군무노) : ‘志決身殲(지결신섬)’은 뜻을 굳게 정하여 순직(殉職)했다는 뜻이다. ‘軍務勞(군무노)’는 제갈량이 군사를 이끌고 북벌하는데 군무가 번다하여 일 때문에 병이 났다는 의미이다.

*이 시는 제갈무후(諸葛武侯)를 노래한 작품으로 시 전체가 제갈량의 위대함을 칭송하고 있다. 시의 시작에서부터 제갈량의 위대함에 대해 아낌없이 찬미한 것을 보면 두보가 평소에 그를 얼마나 깊이 존경하고 흠모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특히 5·6句에서는 역사인물에 대해 두보가 지녔던 포폄(褒貶)의 척도가 드러난다. 그는 제갈량이 伊尹(이윤)·呂尙(여상:강태공)과 서로 비슷하고 심지어 蕭何(소하)와 曹參(조참)을 능가한다고까지 말하였는데, 이는 夏·殷·周 三代(하.은.주 삼대)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높이 평가하고 무력으로 천하를 차지한 한나라의 패도정치(霸道政治)를 폄하하는 역사비평의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한(秦漢) 이후에는 제갈량만이 이윤·여상과 막상막하의 위치에 있다고 시인은 말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두보의 ‘竊比稷與契(절비직여계:속으로 후직과 설에게 비교한다.)’의 정치포부 및 ‘薄斂近休明(박렴근휴명:조세를 적게 거둠이 밝은 정사이다.)’, ‘邦以民爲本(방이민위본: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다.)’의 정치이상과 일치한다. 결국 두보는 제갈량의 공적과 품덕을 찬양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상과 회포를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이윤(伊尹)은 하나라 말기부터 상나라 초기에 걸친 정치가이다. 상 왕조 성립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름은 지(摯)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윤의 어머니는 대홍수에 휩쓸려가 뽕나무가 되었고 그 줄기에서 이윤이 태어났다고 한다. 여기에서 이윤은 홍수의 신으로 보는 설이 존재한다.
성인이 된 후에는 요리인으로서 어느 귀족을 시중들었고 주인의 딸이 상의 군주인 자리(훗날의 탕왕)에게 시집갈 때에 그 심부름꾼으로서 자리를 시중들었다. 이 때 그 재능을 자리에게 인정받아 상의 국정에 참여해 중책을 맡기에 이른다.
상이 하를 멸할 때에도 활약했고 상 왕조 성립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아형(阿衡)으로서 탕왕을 보좌해 수 백년동안 이어지는 상 왕조의 기초를 굳혔다.
탕왕의 사후에 그 아들인 외병과 중임의 두 명의 왕을 보좌한 후 탕왕의 손자 태갑이 즉위한 후에도 이윤은 계속해 이를 보좌하였다. 그러나 태갑은 방탕한 생활을 해 국정을 어지럽혔으므로 이윤은 태갑을 동(桐)으로 추방했고 섭정으로서 태갑을 대신했다. 3년 후 태갑이 회개한 것을 확인한 후에 다시 그를 왕으로 맞이해 스스로는 신하로 되돌아갔다.
이윤은 태갑의 아들 옥정의 시대에 죽었다고 한다.

*강상(姜尙:태공망,강태공)은 기원전 1211년(은나라 경정(庚丁) 8년)에 출생하여 기원전 1072년(주강왕 6년)에 사망할 때까지 나이가 139세에 달했다. 또다른 중국 기록에서 강상은 기원전 1140년 9월 12일(음력 8월 3일(~5) ~ ?)에 태어났다고 한다.
기원전 11세기 중국의 은나라를 멸망시킨 인물로 염제신농의 후손이라고 전해오며, 동해가 고향이다. 동해는 동해상으로도 불린다. 성은 강(姜), 씨는 여(呂), 이름은 상(尙), 자는 자아(子牙)이며, 호는 비웅(飛熊)이다. 주왕이 항시 꿈에서라도 바라던 인물이 비로소 나타났다 하여 흔히들 태공망이라고도 불렸다
강태공의 본관은 천수 강씨(天水姜氏)이며, 염제신농씨의 후손이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공신이며, 전국칠웅인 제(齊)나라의 공작이 되었다.
강태공의 자손들(강급, 강소백 등)이 대대로 제나라를 이끌어왔으며, 이 시기에 중국의 고(高), 노(盧), 여(呂), 허(許), 구(丘,邱), 강(强), 방(方), 정(丁), 장(章), 사(謝), 제(齊), 하(賀), 향(向), 가(柯), 뢰(賴), 초(焦), 기(紀), 최(崔), 좌(左), 역(易)씨 등 수많은 성씨가 강태공의 자손으로부터 갈라져나갔다. 강태공 사당에는 해마다 강태공의 후손과 강씨에서 분파된 성씨가 대거 참례를 온다.
현재 강태공의 후손은 분성 성씨 외에 한국의 진주 강씨와 중국의 천수 강씨가 있다.

*소하(蕭何, ?~기원전 193년)는 진(秦) 말기에서 전한 초기에 걸쳐 활약한 정치가이다. 유방의 참모로서 그가 천하를 얻도록 도왔으며, 전한의 초대 상국을 지냈다. 한신, 장량과 함께 한의 삼걸(三傑)로 꼽힌다. 시호는 차문종후(酇文終侯)다.
유방과 같은 패현(沛縣) 출신으로 젊어서부터 현지의 하급 관리로 근무하면서 성실함과 능률을 인정받았다. 똑같이 훗날 전한의 개국공신이 되는 조참은 그의 부하였다.

*조참(曹參, ? - 기원전 190년)은 전한의 군인이자 개국 공신으로, 자는 경백(敬伯)이며 패군(沛郡) 사람이다. 원래 진나라의 옥리였으나, 고조 유방의 거병 시에 뜻을 같이하였다. 한신과 더불어 군사면에서 활약을 하였다. 진나라와 항우를 공략하여 한나라의 통일대업에 이바지한 공으로 건국 후에는 공신서열 2번째, 평양후(平陽侯)로 책봉되고 식읍 10600호를 하사받았다. 구강왕 경포의 반란을 평정하기도 하였다. 제나라의 재상을 지내다가 혜제 시절에는 소하의 추천으로 상국이 되었고, 황로지학에 의거해 나라를 다스렸다. 시호는 평양의후(平陽懿侯)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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