詠懷古跡五首之一-杜甫
영회고적오수 중 제1수 (詠懷古跡五首之一) - 두보(杜甫)
<고적에서 회포를 읊다>
其一 유신(諛信)
支離東北風塵際 (지리동북풍진제)
풍진 세상에 동북으로 흩어져
漂泊西南天地間 (표박서남천지간)
서남 천지간을 표랑했네.
三峽樓臺淹日月 (삼협누대엄일월)
삼협의 누대에 오랫동안 머무르고
五溪衣服共雲山 (오계의복공운산)
오계족의 옷을 입고 구름 덮인 산을 같이 보았네.
羯胡事主終無賴 (갈호사주종무뢰)
불알 깐 오랑캐가 주인 모시는 건 끝내 교활하여
詞客哀時且未還 (사객애시차미환)
시인은 시절을 슬퍼하면서도 돌아가지 못했네.
庾信平生最蕭瑟 (유신평생최소슬)
유신의 평생은 무척이나 스산하였으나
暮年詩賦動江關 (모년시부동강관)
늘그막에 시부가 장강과 국경을 흔들었다네.
역주1> 支離東北風塵際(지리동복풍진제) : ‘支離(지리)’는 본래 부서져서 형체가 온전치 못한 것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거처가 정해지지 않아 떠돌아 다닌다는 뜻이다. ‘東北風塵際(동북풍진제)’는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던 시기를 가리킨다.
역주2> 漂泊西南(표박서남) : 두보(杜甫)는 촉(蜀)으로 들어간 후 병란(兵亂)으로 인해 성도(成都)와 재주(梓州) 사이를 오갔고, 마지막에는 삼협(三峽)을 나와 운안(雲安)을 거쳐 기주(夔州)로 갔다. 유리표박(流離漂泊) :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다님.
역주3> 三峽樓臺淹日月(삼협루대엄일월) : ‘삼협(三峽)’은 장강삼협(長江三峽)으로 瞿塘峽(구당협)·巫峽(무협)·西陵峽(서릉협)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기주(夔州) 일대를 가리킨다. ‘淹(엄)’은 ‘오래 머문다.’는 뜻이고 ‘日月’은 세월을 지칭한다.
역주4> 五溪衣服共雲山(오계의복공운산) : ‘五溪(오계)’는 고대의 五溪族(오계족)을 말한다. 이 지역은 모두 蠻族(만족)의 거주지로 부락을 이루어 살았으므로 이들을 五溪蠻族(오계만족)이라 부르는데 지금 湖南省(호남성)의 서부에 있다. ≪後漢書(후한서)≫ 〈南蠻傳(남만전)〉에 “무릉의 五溪蠻族(오계만족)은 五彩(오채)의 의복을 좋아한다.[武陵五溪蠻 好五彩衣服]”고 하였다. 여기서는 기주 지방이 멀고 궁벽하여 옷을 입는 풍속이 중원(中原)과 다름을 말한 것이다.
역주5> 羯胡(갈호) : 고대 북방의 소수민족인데, 여기서는 안록산(安祿山)을 지칭한다. 안록산은 본래 胡人(호인)으로, 당(唐) 현종(玄宗)의 총애와 신임을 얻어 동평군왕(東平郡王)에 봉해진 후, 하북(河北) 제도(諸道)의 절도사(節度使)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출신을 들어 ‘갈호(羯胡)’라 칭한 것이다.
역주6> 庾信(유신) : 字는 子山이며 南陽 新野(지금의 河南省 新野縣) 사람이다. 양조(梁朝)에서 벼슬하였는데 후경(侯景)이 반란을 일으키자 강릉(江陵)으로 도망쳤다. 이때 양(梁) 원제(元帝)의 명을 받아 서위(西魏)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서위(西魏)를 이은 북주(北周)의 효민제(孝閔帝)가 그에게 낙주자사(洛州刺史)의 벼슬을 주고 그의 문재(文才)를 아껴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만류하였다. 이 시기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哀江南賦(애강남부)〉를 지었는데, 이것이 당대를 경동(驚動)시켰다. 여기서는 안녹산을 후경에 빗대고 시인 자신을 유신에 빗대어 말하였다.
역주7> 江關(강과) : 여기서는 형주(荊州) 강릉(江陵)을 가리킨다. 양(梁) 원제(元帝)가 강릉에 도읍하였는데, 유신(庾信)이 북주(北周)에 가기 전에 강릉에 산 적이 있다. 그가 살던 곳은 전하는 말에 송옥(宋玉)의 옛 집이라고 한다.
*안록산의 난:

안·사의 난(安史之亂, An Shi Rebellion)은 755년 12월 16일부터 763년 2월 17일에 걸쳐 당나라의 절도사인 안녹사와 그 부하인 사사명과 그 자녀들에 의해 일어난 대규모 반란이다. 안·사의 난이란 안녹사와 사사명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안녹사의 난〉 또는 〈천보의 난〉(天寶之亂)이라고도 한다. 안녹산은 나라 이름을 연(燕)이라고 하여 칭제를 했으며, 9년간 지속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중국의 인구는 3600만명이 줄어들었으며, 이것은 전란으로 소실된 호적 체계 때문이기도 하였다.
당나라 말기 율령제의 변질, 균전제와 조용조의 변화, 부병제의 붕괴 등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개원의 치를 이끌었던 현종은 양귀비에 빠져서 정치를 고력사 등의 환관들에게 넘겼고, 이로 인해 양국충 등의 외척과 환관들의 본격적인 환관-외척정치가 시작되었다. 환관과 외척들의 전횡과 부패 속에서 제도와 관리들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권력 다툼은 결국 755년 안녹산에게 난을 일으킬 명분을 주게 된다.
부패한 관리와 환관정치로 인해, 수탈을 당할 대로 당한 농민의 소외로 자립 소농민층이 해체된 것도 원인이다. 해체된 자립 소농민층은 유민화되었다.
당나라는 이때 지배체제를 시작하려고 했지만, 측천무후 때 억압된 귀족 세력이 현종 때에 다시 집권했다. 구집권층과 지주, 상인층 출신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위키백과>
*영회고적(詠懷古跡)〉 5수는 고적(古跡)을 빌려 두보 자신의 회포를 읊은 것이다. 대당(大曆) 원년(元年:766) 가을 기주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 〈秋興(추흥)〉 8수, 〈諸將(제장)〉 5수와 더불어 천고에 전해지는 불후의 명편이다. 이 작품은 시학(詩學)에 있어서, 고시에서 율시로 이행되는 과도기의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시에서 서술한 고적은 강릉(江陵)·귀주(歸州)·기주(夔州) 일대의 유신(庾信) 고거(故居), 송옥(宋玉)의 집, 명비촌(明妃村), 영안궁(永安宮), 선주묘(先主廟), 무후사(武侯祠) 등지를 포괄한다. 고적을 통해 고인(古人)을 추회(追懷)하였고 매 首를 나누어 읊었다.
제1수의 앞부분 6구는 자신의 처지를 쓴 것으로, 자서(自序)이며 동시에 다섯 편의 총서(總序)이기도 하다. 마지막 연(聯)에서는 유신을 말하여 유신의 평생을 자신의 삶, 장안(長安)으로부터 형촉(荊蜀)에 이르기까지의 일단의 생활에 비겼다.
그러나 유신의 고거(故居)는 강릉에 있고 두보(杜甫)는 아직 그곳에 도착하지 않았으니, 먼저 그를 노래한 것은 은연중에 삼협(三峽)을 나가고 싶은 소망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