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遇之感-故事成語
지우지감(知遇之感)
자기의 인격이나 학식을 잘 알아서 후하게 대우해 준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말한다.
知 : 알 지(矢/3)
遇 : 만날 우(辶/9)
之 : 갈 지(丿/3)
感 : 느낄 감(心/9)
출전 : 삼국연의(三國演義) 第009回
이 성어는 삼국연의(三國演義) 第009回에 나오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때는 사도(司徒) 왕윤(王允)이 초선(貂蟬)을 이용한 미인계(美人計= 정사 삼국지에는 없음)를 써서 여포(呂布)로 하여금 동탁(董卓)을 죽이고 나서 수고한 장병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
주연 중에 누군가 보고한다. “저잣거리에 내놓은 동탁의 시체에 갑자기 한 사람이 엎드려 대성통곡하고 있습니다.”
왕윤이 노하여 말한다. "동탁이 주살되어 사대부나 백성들이 축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 자가 누구데 감히 홀로 곡을 하느냐?“
즉시 무사를 불러 "그 자를 내 앞으로 잡아와라!" 라 했다.
잠시 후, 잡혀온 사람을 보고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딴 사람도 아닌 시중(侍中) 채옹(蔡邕)이다.
왕윤이 꾸짖는다. "동탁은 역적이 오늘 주살된 것은 나라의 큰 행운이거늘, 너 역시 한나라의 신하된 자로 나라를 위해 축하하지 않고 도리어 역적을 위해 곡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채옹이 복죄(죽을죄로 벌 받음)하면서 말했다. "제가 비록 재주가 없으나 또한 대의를 압니다. 어찌 기꺼이 나라를 배반하고 동탁을 두둔하겠습니까? 단지 한때 동탁이 나를 알아주었다는 감정으로 저도 모르게 그를 위해 한차례 곡을 했습니다. 스스로 죄가 크다는 것을 압니다. 원컨대 공께서 그 연유를 참작하여 주십시오. 만약 경수월족(黥首刖足-죄인의 얼굴에 죄명을 문신하고 발을 자르는 형벌)의 벌을 내리시고 저를 시켜 한나라 사서(史書)를 이어서 완성하게 하여 속죄할 기회를 주신다면 저는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邕雖不才,亦知大義,豈肯背國而向卓?只因一時知遇之感,不覺為之一哭,自知罪大。願公見原:倘得黥首刖足,使續成漢史,以贖其辜,邕之幸也)."
관리들이 다 채옹의 재주를 아껴 모두 힘써 구하려고 했다.
태부(太傅) 마일제(馬日磾)도 가만히 왕윤에게 말한다. "백개(伯喈=채옹의 자)는 광세일재(曠世逸才=당대에 견줄 사람이 없는 뛰어난 재주)이니 한나라 사서를 이어 완성토록 한다면 진실로 성대한 일을 이루게 됩니다. 또한 그는 효행이 평소 널리 알려졌으니 함부로 죽이면 인망을 잃을까 두렵소."
왕윤이 말한다.
"예전에 효무제(한무제)께서 사마천을 죽이지 않아, 후에 그가 사기(史記)를 써서 결국 황실을 비방하는 책이 전해지게 되었소. 지금은 국운이 쇠미하고 조정이 어지러운데, 영신(佞臣=간신)를 시켜 어린 황제의 좌우에서 붓을 들게 하면 우리들은 그의 비방을 면하지 못할 것이오.“
마일제가 말없이 물러나 뭇 관리와 사담을 나누며 말한다. "왕윤은 후손을 남기지 못하리다! 착한 사람은 국가의 기강이요 사서의 제작은 국가의 전범이오. 기강을 멸하고 전범을 폐지하는데 어찌 오래 갈 수 있겠소(王允其無後乎!善人,國之紀也;制作,國之典也。滅紀廢典,豈能久乎)?"
그 자리에서 왕윤이 마일제의 말을 듣지 않고 채옹을 하옥하여 목 졸라 죽였다. 당시 사대부가 듣고 모두 눈물 흘린다. 훗날 사람들이 의논하기를, 채옹이 동탁에게 곡한 건 역시 옳지 않지만 왕윤이 죽인 건 너무 심하다 하였다.
채옹의 죽음과 관련해서 삼국연의에는 그가 저자거리에 내버려진 동탁의 시신 앞에서 통곡한 것이 화근이 되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지와 後漢書 등에는 이런 기록은 보이지 않고 다만 主簿 田景이 동탁의 屍身을 껴안고 통곡하다가 여포에게 붙잡혀 살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채옹(蔡邕)
자는 백개(伯喈). 진류 어현 출신.
천하의 재사라고 불리던 후한 말의 명사. 젊어서부터 박학하기로 소문이 났으며, 효성이 지극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다. 시문, 천문, 음악, 문장 등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영제때부터 낭중(郎中)이 되어 동관에 종사했고, 175년에 제경의 문자평정을 주청하여 스스로 돌에 새긴 후 태학의 문 밖에 세웠으니 이것이 '희평석경(熹平石經)'이다. 후에 중상모략을 받고 유배되었다가 대사령을 받았으나 돌아오지 않고 오에서 10년을 머물렀다. 189년에 동탁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발탁했는데, 그리하여 어쩔수없이 그를 섬기며 시어사(侍御史), 시중(侍中)을 지냈고 나중에 좌중랑장(左中郞將)까지 승급하였다. 동탁이 여포의 배신으로 죽음을 당하자 이를 곡하다가 왕윤에게 동탁파로 오인받고 옥에 갇혀서 죽었다. 후한말 여류시인 채염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다.
대표작으로는 조정의 제도와 칭호에 대하여 기록한 '독단(獨斷)', 시집 '채중랑집(蔡中郞集)'이 있다. 또 '비자체(飛自體)'를 창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