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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雨後-/孟郊

시뜨락 시정(詩庭) 2024. 4. 7. 20:29

春雨後(춘우후) :
봄비 내린 후

昨夜一霎雨(작야일삽우)
어젯밤 한 차례 가랑비가 내렸으니
天意蘇群物(천의소군물)
하늘이 만물을 소생케 하려는 것이라.
何物最先知(하물최선지)
어느 것이 가장 먼저 그 뜻을 알랴했더니
虛庭草爭出(허정초쟁출)
빈 뜨락에 봄 풀들이 앞다투어 나는구나.

註. 霎(삽): 가랑비.
‘霎霎’은 빗소리를 나타낸다.
(一霎雨가 一散雨(일산우)로 된 본도 있다)

맹교(孟郊 :751~814)
당조(唐朝)의 시인으로 자는 동야(東野), 호주(湖州 )무강(武康: 지금의 저쟝성(浙江省) 덕청德淸) 사람이며 맹호연(孟浩然)의 손자이다. 현존하는 시가가 5백여 편인데 단편인 오언고시로는 많지만 율시는 한 편도 없다. 대표작으로는 유자음(遊子吟: 나그네의 노래)을 꼽는다. 어려서 가정이 빈한하여 여러 곳을 주유했고 과거에도 여러 차례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다가 마흔여섯(일설에는 45세) 늦은 나이에 비로소 진사가 되었다. 정원(貞元 17년 801) 율양위가 되었는데 일보다는 시 짓는 데 열중하여 감봉을 당하기도 했다. 한유(韓愈)는 그런 맹교를 일러 ‘산한율양위酸寒溧陽尉(군색한 율양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맹교가 세상을 뜨자 오랜 벗인 장적(張籍)이 정요선생(貞曜先生)이라는 사시(私諡: 학덕이 높은 선비이기는 하나 지위가 없어서 나라에서 시호(詩號)를 내리지 않을 때, 일가친척이나 고향 사람 또는 제자들이 지어 주던 시호. )를 지어주었다. 한유의 복고주의에 동조하여 작품도 악부나 고시가 많았는데 외면적인 고풍 속에 예리하고 창의적 감정과 사상을 담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식(蘇軾)이 ‘교한도수(郊寒島瘦 : 맹교는 춥고 가도는 여위었다))’라고 말한 이후, 평론가들이 맹교와 가도(賈島)를 병칭하여 고음시인(苦吟詩人) ( 苦吟 : 고심하여 시가(詩歌)를 지음 )의 대표로 불렀다. 맹동야시집(孟東野詩集) 10권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