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의 漢陽.漢江-8白岳山.壽城舊址
<백악산 白岳山>

세종로 네거리에서 백악산을 바라보면 산이 마치 하얀 연꽃 봉오리처럼 보인다고 하여 백악산, 서울의 진산(鎭山)으로 북주 (北主)가 된다 하여 북악산(北嶽山)이라고도 부른다. 정선은 백악산 자락 유란동(幽蘭洞)에서 태어나 평생 노닐었으니 백악산의 진면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백악산의 상봉을 산뜻한 필치로 그려내었다. 동쪽 기슭의 큰 바위는 백악산의 특징인 비둘기 바위이며, 오리 바위(鳬岩 오리부 부암)라고도 했는데, 정선은 거북 머리가 치솟아 오른 형태로 그렸다. 대담한 붓질과 짙은 먹칠로 흰색 화강암을 완전 반대색인 검은빛 일색으로 그려 놓았다. 정선이 인왕산이나 백악산을 그리면서 이런 흑백 도치법을 구사한 것은 그가 『주역』에 정통하여 음양대비와 음양조화의 논리를 거침없이 사용했기 때문이었을 듯하다.
*그림 좌측 제발에는 '白岳山,謙齋寫與直甫 (백악산, 겸재가 직보에게 그려 주다)' 라는 설명이 있다. 직보는 한성부 서윤(庶尹: 판윤과 좌우윤을 보좌하던 종사품 벼슬)을 지낸 김정겸(金貞謙: 1709~1767)의 자(字)라 한다. 김정겸은 영의정을 지낸 김수흥의 손자이니 장동 김문(金門)의 한 사람으로, 겸재에게는 가벼이 할 수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수성구지 壽城舊址>

인왕산 기슭의 수성(壽城) 옛 터를 그린 그림이다. 아마도 자수원(慈壽院) 터를 그린 것으로 생각되는데, 자수원은 광해군 (光海君, 재위 1608-1623) 때 선왕의 후궁들을 모여 살게 했던 자수궁(慈壽宮)과 수성궁이 인조(仁祖, 재위 1623-1649) 때 비구니 승원으로 바뀌게 되면서 얻은 명칭이다. 자수원은 1661년 철폐되었으며, 정선 대에는 건물도 없어진 후여서 '수성 옛 터'로 불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정선은 화면 우측에 자수원으로 생각되는 건물을 그려 넣었는데, 이는 실재한다기보다는 정선이 이 장소의 역사적 의미를 환기시키고자 넣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먹으로만 그렸고 인물도 그리지 않아 화면 가득 고즈넉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풍기는데, 이는 이 장소의 역사적 의미와 사라진 과거의 모습을 기억하고자 하는 의도로 추정된다.
겸재 의 漢陽.漢江-9 洗劍亭.西氷庫望都城
'검을 씻는다'는 뜻의 세검정은 창의문 밖 삼각산과 백운산 사이에 위치하며 현재의 종로구 신영동 부근이다. 세검정의 유래는 1623년 인조반정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는 설과 17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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