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登竹西樓-石川 林億齡

시뜨락 시정(詩庭) 2025. 5. 27. 03:36

등죽서루(登竹西樓)-石川 林億齡
<죽서루에 올라>
1
朱鳳不司晨(주봉불사신)
붉은 봉황새는 새벽을 주관하지 않는데
神龍寧掛網(신룡녕괘망)
신령스러운 용이 어찌 그물에 걸리리요
揮手謝塵間(휘수사진간)
어지러운 세상 손사래를 치며 사절하고
挾風遊海上(협풍유해상)
바람을 끼고 바닷가에 살면서 노닐리라
身與白鷗雙(신여백구쌍)
내가 갈매기들과 더불어 짝을 이룬다면
樓爲黃鶴兩(누위황학냥)
죽서루는 황학과 더불어 짝을 이루리라
一川遠橫通(일천원횡통)
오십천은 멀리 구비구비 비껴 흐르는데
群峯鬱相向(군붕울상상)
빽빽하게 솟은 봉우리들 서로 마주보네
笑傾張翰杯(소경장한배)
비웃어도 강동 장한처럼 술잔 기울이고
寒擁王恭氅(한옹왕공창)
추워도 왕공처럼 학창의로 몸을 감싸네
笛奏野梅飄(적주야매표)
피리를 연주하자 들매화 꽃잎 흩날리고
雨微庭杏放(우미정행방)
보술비 내리자 마당의 살구 떨어지누나
高歌雲與飛(고가윤여비)
큰소리로 노래 부르니 구름도 일어나고
百慮灘俱漲(백려탄구창)
갖가지 시름에 여울도 함께 물결치누나
沙邊有小舟(사변유소주)
오십천변에는 일엽편주 한 척이 있으니
載月蓬萊訪(재월봉래방)
달빛을 가득 싣고서 봉래섬 찾아갈까나

제37회 인천서예대전 초대작가전에서

2
江觸春樓走(강촉춘루주)
강물은 봄 누각을 부딪히면서 달려가고
天和雪嶺圍(천화설령위)
하늘은 눈덮힌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네
雲從詩筆湧(운종시필용)
구름은 시쓰는 붓을 따라서 솟아오르고
鳥拂酒筵飛(조불주연비)
새는 술자리를 스치듯 아슬히 날아가네
浮雲如今是(부운여금시)
기분이 구름처럼 떠오르는 지금은 옳고
趨名悟昨非(추명오작비)
명리 뒤쫓던 지난날의 그릇됨 깨달았네
松風當夕起(송풍당석기)
저녁때가 되어 소나무에 바람 일어나니
蕭颯動荷衣(소삽동하의)
서늘하게 은자의 옷자락을 날려 올리네
3
樓高受細雨(누고수세우)
높다란 누각 가랑비에 부슬부슬 젖는데
峽坼噴長川(협척분장천)
산골짜기 터뜨려 긴긴 강물 뿜어대누나
海客把春酒(해객파춘주)
바닷가 나그네 맛좋은 술잔을 잡았는데
山村生暝烟(산촌생명연)
산촌에는 저물녘 어스름 안개 피어나네
山中一夜雨(산중일야우)
산속에서는 밤이 새도록 비가 쏟아지고
海外二毛人(해외이모인)
바닷가에는 머리털 반백의 늙은이 사네
落盡寒梅樹(낙진한매수)
눈속에 핀 매화꽃은 모조리 떨어졌으니
西湖幾度春(서호기도춘)
서호는 얼마나 많은 봄이 지나갔을까나
犬吠踈籬店(견폐소리점)
울타리 엉성한 주점에는 개만 짖어대고
舟搖細雨江(주요세우강)
가랑비 내리는 강에 일엽편주 흔들리네
鄕心關雪嶺(향심관설령)
고향생각은 눈 쏟아지는 고개에 묶였고
客慮集春窓(객려집춘창)
나그네 근심은 봄날의 창가에 모이누나
天暝雲無定(천명운무정)
하늘은 어두운데 구름은 무심히 흐르고
風輕帳有波(풍경장유파)
실바람에 휘장은 마치 물결처럼 휘날려
桃源淸絶地(도원청절지)
더없이 청정한 땅 무릉도원과도 같아라
衰白遠來過(쇠백원래과)
흰머리 늙은이 멀리서 왔다 지나가노라

*1554년(명종 9) 강원도 관찰사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은 금강산 등 관동의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그해 정월에는 수종사(水鐘寺), 오정(梧亭) 등지에 다녀온 뒤 시를 지었고, 2월에는 강릉의 청허루(淸虛樓), 종각루(鐘閣樓), 사새진(沙塞津),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해학정(海鶴亭), 삼척의 죽서루 등지에 오른 뒤 누정시를 남겼다.
죽서루에서는 '등죽서루(登竹西樓)'라는 제목의 시를 여러 수 지었다.

죽서루에 올라 주변의 산들과 오십천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구름이 일어나듯 마구 솟아오르는 흥취를 읊은 시다. 이 시에서도 벼슬살이보다는 시인으로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심정이 드러나 있다.

임억령의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대수(大樹)다. 임득무(林得茂)의 증손, 임수(林秀)의 손자, 임우형(林遇亨)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박자회(朴子回)의 딸이다. 호남 사림(士林)의 원조 박상(朴祥)의 문인이다.

1516년(중종 11) 임억령은 진사가 되었고, 1525년(중종 20) 식년 문과에 급제한 뒤 부교리,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사간, 전한,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 등을 지냈다. 금산군수로 있을 때 그는 동생 임백령(林百齡)이 윤원형의 소윤 일파에 가담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의 많은 선비들을 죽이는 것을 보자 이를 자책하고 벼슬을 사직하였다. 그 뒤 임백령이 원종공신의 녹권(錄券)을 보내오자 격노하여 이를 불태우고 고향인 해남에 은거하였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1552년(명종 7) 동부승지, 병조참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1557년(명종 12) 담양부사가 되었다.

임억령은 시문에 능하고 사장(詞章)에 탁월하였으므로 호남의 사종(詞宗)으로 일컬어졌다. 그는 담양의 식영정(息影亭)에 살면서 김성원(金成遠), 고경명(高敬命), 정철과 함께 식영정 4선(息影亭四仙)으로 불렸으며, 안방준(安邦俊), 김인후(金麟厚)와 더불어 호남3고(湖南三高)로 불리기도 했다. 전라남도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 해남의 석천사(石川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석천집(石川集)'이 있다.